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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실 ■/김광현의 건축으로 읽는 일상 풍경

김광현의 건축으로 읽는 일상 풍경 - ⑥ 사그라다 파밀리아 (下)

 

<지식카페>무신론자였던 가우디, 어느새 信者로… “내 건축주는 하느님”

  • 문화일보
  • 입력 2018-08-22 11:16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내부. 1882년에 착공, 아직도 지어지고 있으며 건축가인 안토니 가우디가 죽은 지 100년이 되는 2026년에 완공 예정이다. 김광현 교수 제공

 


 
■ 김광현의 건축으로 읽는 일상 풍경 - ⑥ 사그라다 파밀리아 (下)

책임건축가 된 이후 聖書숙독
生前 미완성도 ‘神의 뜻’으로

중단땐 건물에 피해갈까 우려
낯선 이 찾아다니며 모금나서
“내 건축주는 서두르지 않으셔”
인생 후반이 ‘건축 위한 기도’

가우디 바보취급했던 피카소
‘모금 모습’ 비웃는 그림 그려

74세에 초라하게 숨진 가우디
장례식엔 끝없는 시민들 행렬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교회나 국가가 나서서 지은 것도 아니며 부호의 막대한 기부로 지어진 건물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가난한 신자들의 신앙 단체를 위한 성당으로 시작됐다. 안토니 가우디 스스로도 전임 건축가의 안으로 3년간 공사하고 난 후, 이 성당은 10년만 지나면 완성할 수 있으리라고 말했을 정도의 건물이었다. 그러던 것이 장대한 성당으로 새로이 구상됐고, 1898년에는 ‘탄생의 파사드’가 새로운 계획의 일부로 남쪽 입구에 완성됐다. 그러나 이때 1891년부터 들어오던 건설비용이 바닥나고 말아 오랫동안 공사가 중단됐다.

거의 무신론자에 가까웠던 가우디는 이 성당의 책임 건축가가 된 이후부터는 미사 전례와 그리스도교 예술에 정통하게 됐고, 성서를 암송할 정도로 숙독했다. 그리고 깊은 신앙인이 돼 갔다. 그러나 가우디는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 성당은 완성되지 못할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하느님의 뜻이라고 알게 됐다. 제안자 주제프 마리아 보카베야도 중세의 대성당이 그러했듯이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도 몇 세대, 몇 세기에 걸쳐 지어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1888년과 1889년 사이에도 공사가 중단된 적이 있었으나 성요셉 협회는 이 사실을 외부에 일절 공개하지 않았다. 그 이후 1903년에서 1907년까지, 그리고 1912년에서 1917년까지 공사는 몇 차례 중단됐다.

1900년 12월 카탈루냐 최대의 시인 호안 마라갈(Joan Maragall)은 공사가 중단돼 있는 것이 안타까워, ‘태어나는 성당’(El templo que nace)이라는 제목으로 이 성당을 찬미하는 시를 신문에 실었다. “‘탄생의 문’은 건축이 아니다. / 예수 탄생의 기쁨을 영원히 노래하는 시 / 돌덩어리에서 태어난 건축의 시 / 미완성의 형태에서 이 성당에 목숨을 건 한 사람의 정열이 보인다. / 그는 성당의 완성을 자기 눈으로 보려 하지 않는다. / 건축이 유지되기를 후세 사람에게 맡기고 싶어 할 뿐. / 그가 만들고 있는 것은 카탈루냐 자신이다.”

이 시는 이 성당의 존재를 시민들에게 널리 알린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매스컴은 시민들에게 헌금을 호소했고, 평론가나 예술가 그리고 건축가들도 지면을 통해 이 성당은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걸작이니 모금하자고 독려했다. 이처럼 공사가 중단되고 장기화할수록 이 성당과 가우디의 이름은 더욱 널리 퍼졌고, 힘들 때마다 그야말로 많은 사람이 협력자로 나타났다.


안토니 가우디의 장례 행렬.


그렇다고 이때의 모금이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성당을 찬미하는 시를 쓴 시인 마라갈은 저 ‘태어나는 성당’을 한번 보기만 한다면 그 숭고함에 마음이 움직여 모두 헌금을 해 주리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 예상은 빗나갔다. 시민들의 헌금은 적었고 이로써 성당의 건설 자금 사정은 극도로 심각해져 갔다.

이에 1905년 마라갈은 카탈루냐 사람들을 향해 질책하는 글을 신문에 썼다. 이 유명한 글의 제목은 ‘자비의 은총’(¡Una gracia de caridad…!)이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바르셀로나의, 카탈루냐의 이상을 나타내는 기념비이며, 끝없이 상승하려는 신앙의 상징이다. 또 이것은 하느님을 향한 애타는 심정을 돌로 나타낸 것이며, 시민의 정신을 비춰주는 것이다.” 이 글은 일종의 격문이었다. 그는, 가우디는 하느님께서 성당 건설을 맡기신 하느님의 일꾼이며, “이 성당을 만들고 있는 사람이 동시에 우리 카탈루냐 사람들 자신을 만들고 있다”고 역설했다.

이 마라갈의 격문은 모든 카탈루냐 사람을 감동시켰으며 가우디도 이에 감동했다. 이틀 후 마라갈의 격문에 찬동하는 정계와 재계 지도자, 주교들, 시인, 예술가, 평론가 등 저명인사 23명이 가우디의 건축을 지원하자고 연명했고, 신문, 잡지사가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위한 헌금을 호소하는 특집을 게재했다. 이를 계기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성요셉 협회’의 성당에서 바르셀로나의 상징으로, 그리고 다시 카탈루냐 정신의 상징으로 바뀌어 갔다.

그럼에도 적자는 계속 쌓여 1914년 건설위원회는 어쩔 수 없이 또다시 건설 중단을 결정했다. 이에 가우디는 반대했다. 공사를 중단하면 건물에 손상이 갈뿐더러 다시 공사를 시작하는 데 큰 비용이 들 것이고, 게다가 숙련된 장인들을 잃게 되니 중단 결정을 거둬달라고 간청했다. 물론 가우디도 받기로 한 보수를 받지 못한 지 오래됐다. 그런데 마라갈은 1905년 격문에서 “왜 가우디 선생은 한 손에 모자를 들고 온종일 거리에 나가 모든 사람에게 성당을 지을 헌금을 해 달라고 소리 높여 청하지 않는가?”라고 쓴 적이 있었다. 이때 가우디는 마라갈의 이 말대로 하루에 한 번 이상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집을 방문하며 도움을 청하러 나섰다. 건축가가. 그의 나이 62세였다.

가우디는 시민들에게 이렇게 청했다. “오직 하느님의 집을 위하여,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위해 헌금을 부탁합니다. 인생의 반을 성당에서 보낸 저는 이 성당의 작은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습니다. …. 저는 성당에서 보수를 받지 않습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라는 나의 작품 말고는 다른 일을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성당 건축을 할 수 있기만 바랄 뿐입니다.”

가우디는 특히 부자들에게 많은 헌금을 요청했다. 그래서 마음이 내키지 않는 부자들이 길을 가다가 멀리서 가우디를 보면 그를 피하려고 다른 길을 건너기도 했다. 가우디가 어떤 자산가에게 희생을 부탁했다. 그는 “희생이라니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기꺼이 헌금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가우디는 “그러면 희생한다고 생각될 정도로 큰 금액을 내주세요. 희생이 없는 자선은 자선이 아니라 그저 허영일 뿐이에요”라고 말했다. 그가 이렇게 가가호호 방문한 보람은 있었다. 덕분에 공사 중단은 일주일 연기됐고, 또다시 일주일 연기됐다.

이 소식을 들은 건축학교 학생들이 모금 운동에 나섰다. 바르셀로나 주교도 공사가 중단돼서는 안 된다며 정계 인사들과 함께 특별 미사를 올렸다. 카탈루냐 건축가협회는 모금에 동참했고, 목재조합은 건설에 필요한 비계를 만들 재료를, 석재조합은 한 달 치 석재를 제공했다. 또 바르셀로나시는 설계를 위한 모형 제작비용을 부담했다. 그중에서 가장 큰 헌금은 필요한 액수를 원하는 대로 적으라고 어떤 사람이 보내준 백지수표였다. 가우디의 말과 행동이 카탈루냐를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가 이렇게 동조해 준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비웃었고, 때로는 바보 취급을 했다. 그중 제일 비웃은 사람은 스페인 남부 말라가에서 태어나 바르셀로나에 살던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였다. 그는 가우디와 함께 일하던 친구에게 빨리 그 현장을 떠나라고 했고, 모금하러 다니는 가우디를 비웃는 그림을 멀리서 그리기까지 할 정도로 가우디를 철저하게 부정했다.

만년의 가우디는 매일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단조로운 생활을 했다. 성당에서 자고 일하고 기도하다가 오후 6시 15분쯤에는 걸어서 성 필리포 네리 성당으로 저녁 미사를 올리러 갔다. 그러던 1926년 6월 7일 여느 날과 똑같이 이 성당에 미사를 드리러 가던 길에서 전차를 피하려다가 앞의 전주에 부딪혀 피를 흘렸다. 초라한 옷을 입고 양말도 못 신고 수세미를 말린 섬유를 낀 신발을 신은 채 쓰러져 있는 그를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했다. 그의 주머니에는 작은 과일 몇 개, 복음서, ‘수난의 파사드’ 스케치 한 장 그리고 연필만 들어 있었다. 하도 남루해 4대의 택시 운전사가 병원에 데려다주기를 거부하다가 겨우 다섯 번째 택시가 병원으로 옮겨주었다. 그러나 6월 10일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김광현 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

 

바르셀로나시는 시장(市葬)을 검토했다. 그러나 어떠한 명예도 없이 간소한 장례를 해 달라는 그의 유언장에 따라 장례를 준비했다. 이때의 장례행렬 사진을 보면 감동적이다. 누가 나오라고 한 것도 아닌데 가로수의 나뭇잎보다 더 많은 사람이 거리를 메우고 있다. 더구나 이들은 모두 검은색 정장을 입고 같이 길을 걷고 있었으며, 가게 문은 모두 닫았고 셀 수 없는 많은 사람이 발코니에서 이 행렬을 지켜봤다. 장례미사에 함께 참례하기 위해 모인 사람은 3000명을 넘었고, 그 길이는 2㎞나 떨어진 바르셀로나 대성당에 선두가 도착했을 때도 제일 끝 사람들은 병원 근처를 지나가고 있었을 정도였다. 장례 미사는 무려 4시간이나 계속됐다. 건축가로서 이런 장대한 장례식을 치른 사람은 가우디 이외에는 없다. 과연 이 성당은 그들에게 무엇이었기에 이렇게 한 건축가의 죽음을 애도하며 장례에 동참해야만 되었는가?

인생의 후반이 ‘건축을 위한 기도’였던 가우디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 성당을 완성할 수 없다는 것은 슬퍼해야 할 일이 아니다. 대신에 이 성당을 다시 시작하는 다른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래서 이 성당은 많은 사람의 손에서 손으로 이어지고 계속 지어지며, 도시에 영원히 남기 위해 자라고 있는 건축이 됐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돌에서 마라갈의 시의 제목대로 ‘태어나고 있는’ 건축이다.

이 건물의 건축주는 한 분 더 계시다. 가우디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건축주께서는 서두르지 않으신다.”(My client can wait.) 그 건축주는 하느님이셨다. 그 후 2003년부터 가우디는 복자(福者)품에 오르기 위한 절차에 들어가 있으며,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2010년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바실리카(대성전)로 선포됐다.

건축은 모두가 함께 짓는 것이다. 건축물을 짓겠다고 기획한 이, 그것을 설계하는 이, 또 그것을 실제로 짓는 이들,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 모두가 함께 짓는 것이다. 그래서 건축은 커다란 사회적 디자인이다. 회화나 조각은 함께 만들 수도 없고 함께 소유할 수도 없다. 그러나 건축은 함께 지어야 함께 소유할 수 있다. 건축을 구조물의 한 가지로만 여기거나, 경제적 이득으로만 따지거나, 어떤 건물이 지어지든 말든 관심이 없는 안이한 사회는 결코 거대한 사회적 디자인을 만들 수도 없고, 소유할 수도 없다. (문화일보 7월25일자 28면 5회 참조)

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