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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실 ■/스크랩 - 세계의 건축가

세계의 건축가 -085. 피터 베렌스 Peter Behrens

 

1. 건축가 피터  베렌스

출생  1868. 4. 14, 독일 함부르크
사망  1940. 2. 27, 베를린
국적  독일

 

독일 근대건축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고 산업 디자인 분야의 선구자이다.

함부르크에서 미술학교를 다닌 뒤 독일의 미술·공예의 부흥기였던 1897년에 뮌헨으로 갔다. 1900년 헤센 대공의 부름을 받아 대공이 다름슈타트에 새로 세운 예술인마을로 갔다. 1901년 그곳에 자신의 집을 짓고 모든 가구를 직접 만들었다. 1903년에는 뒤셀도르프에 있는 미술공예학교 교장이 되었다.

 

1907년에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세계에서 가장 큰 제조업체에 속하는 AEG(Allgemeine Elektrizitäts-Gesellschaft)의 대표이사 에밀 라테나우가 모든 AEG 제품에 관여할 미술 고문으로 그를 임명한 것이다.

라테나우는 공업에서도 미술가의 세련된 솜씨가 필요하다고 깨달은 선견지명이 있는 경영자였다. 목판화, 책표지 디자인, 도자기, 실내장식품, 직물, 양탄자 따위를 만드는 평범한 화가였던 베렌스는 이때부터 산업 디자인 분야의 창작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AEG의 6각형 상표, 제품목록, 문방구들을 비롯하여 선풍기와 가로등 및 영업소 공장들을 디자인했고

1909~12년에 AEG 공장건물군을 설계했다. 그 가운데 유리 커튼 월이 있는 터빈 조립공장은 당시 독일 건축에 큰 영향을 미친 건물이었다. 이 무렵 발터 그로피우스,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 르 코르뷔지에가 그의 사무실에서 일했다.

 

후기 작품으로는 공장과 정부 청사들이 있는데 뒤셀도르프에 있는 마네스만 공장(1911~12), 회히스트에 있는 염색공장(1920~24),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고전적인 독일대사관(1911~12), 린츠의 오스트리아담배공사 공장(1930)이 대표적이다. 1922~27년에는 빈 미술학교 교수로 활동했다. 후기에 설계한 작품들은 규모가 크고 육중한 건물군이 주류를 이룬다.

출처

 

 

 

 

 

 

 

 

 

2.  디자인 경영의 역사(1) 1900년대-1970년대

by 미래와조우 2023. 10. 29.

미래와조우입니다.

 

 

 

디자인 경영의 역사

 

◆1900~1910년대는 무의식적인 디자인 경영의 기원이라고 할 수있습니다.이 시대는 역사적으로 러시아 혁명(1905)이 발발하였으며, 포드 모델 T를 생산하였고,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습니다.영국 디자인산업협회가 창립(1915)되었으며  유명한 바우하우스(1919)가 설립되었습니다. 이 당시 AEG사의 사회지향적인 예술 지향으로 좋은 디자인은 더 수준 높은 품질을 암시한다고 하여 사람들의 삶을 더 편하기 만들기 위한 디자인을 지향하였습니다. 이때 유명한 산업디자이너 로는 피터 베렌스. 이 사람은 최초의 기업 디자이너라고 할 수 있으며 1907년 부터 AEG사의 디자이너로 활약하였으며, 그로피우스, 미스 반 데 로에, 르 꼬르뷔제등이 이 사람의 사무실에서 함께 일했다고 합니다

 

◆1920년대는 기업디자인 그룹및 디자인 전문회사들이 설립되었는 데,  대공황으로 뉴욕 증권시장이 붕괴되고 디자인 컨설팅 산업의 빠른 성장과 전망이 예견되었습니다. 

GM은 매년 외형과 장식을 교체하는 알프레드 슬론의 전략으로  모델 T만을 고집하던 GM을 포드사를 앞서나가기 시작합니다. 또한 지엠은 미술과 색채부를 설치(1928)하였는 데,이것은 자동차 디자인의 효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GE사는 가전 제품 디자인 부서를 설립하고  가전제품 디자인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30년대는 디자인 컨설팅 산업의 활성화 시기였습니다.

이 당시는 대공황이 확산되어 국제 경제의 불균형과 대규모의 실업사태, 군수 산업이 육성되는 시기였으며, 대량 생산되는 예술로서 모든 제품에 디자인을 세련되게 하려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뉴 바우하우스가 1937년에  모홀리 나기에 의해 설립되었으나, 사망 후 일리노이 공과대학에 합병되었으며 , 올리베티사의 알렉산더 샤윈스키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지오바니 핀토리가 그래픽 디자인 책임자로 역할을 하게되며 69년까지 31년간 이 회사의 그래픽 디자인이 세계적인 명성을 유지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1940년대는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습니다. 많은 인력이 군데에 차출되고 물자의 부족으로 인하여 디자인분야는 큰 어려움을 겪었으나 군수품의 디자인이 새로운 기회가 되었지요.  영국 정부에서는 산업체에 자문단을 파견하고, 다영디자인상,에든버러 공 디자이너상을 제정하여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주었답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군수산업이 민영화로 전환되어  많은 디자인 전문회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영국 DRU 설립(1943), 영국 ColD설립(1944) ,미국 ColD설립(1944), 영국제 전람회 개최(1946)되어 국가 경제에 미치는 디자인의 중요설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50년대는 colD가 국제디자인학술대회를 개최하여 산업디자인이 기업 생존에 필수적임을 강조하고 디자인 정책은 최고 경영자의 책임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아스펜 대회(1954-1956)에서는  경영기능으로서의 디자인이 채택되어 디자인과 상업의 성공적 통합을 위해 논의하였습니다. 1950년대 자동차디자인의 귀재 이며 지엠사의 디자인 책임자로 근무한 할리 얼은 지속적 수요의 증대와 생산의 증가를 보장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오일 쇼크로 인하여 재고되기시작하고 ,일리노이 공과대학교 디자인 대학장인 제이 더블린은  미래디자인 경영자를 기르는 교육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1960년대에는  디자인 경영에 대한 저술 활동이 활발하였습니다.

마이클 파르의 디자인 경영 출판하였고, 마이클 미틀턴 은 디자인 분야의 그룹 실무를 출판하였습니다. 또한 디자인 경영을 공식적으로 용어화하였습니다. 

 

◆1970년대는 교육계가 주도 했습니다. IBM사의 회장인 토마스 왓슨 2세는 펜실바니아 대학교 의 디자인경영 강연회에 초빙되어 좋은 디자인은 좋은 사업이다는 강연을 하여 IBM의 디자인 경영이 사업의 성공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최고경영자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역설하였습니다. 

맥매스터 대학의 교육과정(1971) '중역들을 위한 디자인 경영교육과정'을 개발하여 디자인 자체를 교육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조직의 목적 달성을 위해 디자인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 가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매니토바대학의 디자인 경영 센터에서는 기업 중역을 만나는 의도로 여덟개 프레젠테이션 방식의 교육을 하였습니다.

미국의 유일한 전문 디자인 경영 연구기관으로 매사추세츠 미술대학의 부설기구로  디자인경영협회(DMI)를 설립하였으며 연구,교육프로그램,출판을 통해 디자인실무에 대한 경영교육을 하였습니다. 79년 이휴 매년 기업디자인 경영회의를 개촤하고 그외 디자인 경영 활동을 지도하였습니다.

출처 - 디자인 경영의 역사(1) 1900년대-1970년대 (tistory.com)

 

 

 

 

 

 

 

 

 

 

 

3.  20세기의 디자인의 서막을 알린 만능 디자이너, 피터 베렌스(Peter Behrens)

 

20세기의 디자인의 서막을 알린 만능 디자이너, 피터 베렌스(Peter Behrens)

1868년 함부르크 태생. 독일의 건축가, 디자이너 겸 화가.
회화와 그래픽 디자인으로 작품세계를 출발해 제품 디자인과 건축 등 다방면에 훌륭한 디자인 작품을 남긴 베렌스의 작업은 독일의 기업인 AEG(Allgemeine Elektrizitaets-Gesellschaft)를 위한 다양한 디자인 작업(CI, 카탈로그 편집 디자인, 광고 디자인 등등)을 통해 그 진가를 발휘했다.



1. 학력과 AEG 이전의 초기 디자인
베렌스가 본격적인 미술 수업을 받게 된 것은 1886년 Karlsruhe의 예술학교에서 회화를 공부면서부터다. 그곳에서의 회화 교육을 받고 뒤셀도르프로 이주한 그는 1889년 12월, Lilli Karmer와 결혼하고 뮌헨으로 이주한다. 베렌스의 본격적인 예술작업은 뮌헨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한다. 1893년 세기말 유럽 전역을 휩싼 새로운 예술 경향에 힘입어 뮌헨에서도 많은 젊은 예술가들이 '뮌헨 세세션' 운동을 벌이게 되면서 그도 그곳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곧 뮌헨 세세션보다 급진적 성향을 띄는 예술운동단체인 Freie Vereinigung Muechener Kuenstler를 창립한다. 당시 오토 에크만(OttoEckmann) 등과 함께 'PAN'이라는 잡지 출간에도 힘을 쏟았다.

1890년대 베렌스의 작업은 회화와 목판화 작업 등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었으며, 꾸준한 전시를 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작품인 'The Kiss'(1899)는 키스하고 있는 한 쌍의 커플을 묘사한 작품으로, 그들의 얼굴 윤곽이라던가 그들의 뒤로 서있는 나무 등에는 당시 유행하던 '유겐트스틸(Jugendstil)'의 영향이 강하게 보여진다. 그는 독일에 상륙한 아르누보 양식인 유겐트스틸'에 참여하면서 1899년 뮌헨에서 창간한 문학지 '디 인젤(Die Insel)'의 디자인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통일된 타이포그라픽 레이아웃을 채용하는 등 추상적 디자인의 장식 등을 통한 실험성을 추구했다.

베렌스가 순수 미술이 아닌 디자인에로 전향하는 것도 이 즈음의 일이다. 응용미술에 대한 열정이 불타오르기 시작하면서, 그는 더 이상의 회화작업을 선보이지 않았다. 그의 첫 그래픽 디자인 작업과 유리잔, 화병, 보석장신구류와 가구 디자인 작업은 1898-1899년 무렵에 첫선을 보인다. 당시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Insel 사를 위한 모노그램(1899년작)은 현재까지도 약간의 수정보완만을 거쳐 사용되고 있을 정도다. 그는 1899년에 베를린 Keller & Reiner 갤러리와 뮌헨 'Glaspalast' 등에서 공예 디자인전을 열었고, 담스타드에서도 전시회를 개최했다. 이들 전시의 성공으로 입지를 굳힌 그는 1899년 담스타드 예술위원으로 임명된다. 올브리히(Joseph Maria Olbrich)와 함께, 베렌스는 담스타드 예술위원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고, 새로운 극장 건축 프로젝트에 부분적으로 참여하면서 극장에서 사용할 대다수의 가구와 테이블웨어 등을 디자인하게 된다. 담스타드에 머물던 시기동안, 베렌스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저술에서 큰 감명을 받았던 것으로 보이며, 니체의 사상이 그의 작품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정황으로 볼 때, 베렌스는 19세기 장식적 감수성에서 20세기 단순하고 기능적인 기하학적 형태로의 전이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한 작가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1903년 1월, 베렌스는 뒤셀도르프 미술공예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된다. 평소 관심을 가지고 있던 베를라게(H.P.Berlage)와 호프만(Josef Hoffmann), 칸딘스키(Vasily Kandinsky) 등에게 뒤셀도르프 학교에서 강연해줄 것을 권유할 정도로 그는 새롭게 밀려드는 네덜란드와 비엔나의 새로운 문화적 조류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담스타드에 머물 당시 그의 작업에 보이던 유겐트스틸의 영향에서 이제는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형태들을 지향하는 쪽으로 작업이 변화하고 있음이 보인다. 사각형, 원주형, 사각형 등의 기본적인 형태가 그가 설계한 건축 디자인과 세인트루이스 박람회 카탈로그 표지 등의 그래픽 작업에 보여지기 시작했다.
베렌스가 사용한 입체파적인 건축 요소들은 당시의 회화나 조각과의 비교를 가능케 할 정도였으며, 3차원적인 공간에 적용된 그의 디자인은 1905년에서 10년 사이에 제작한 여러 상점 디자인을 통해 활발하게 드러나지고 있었다.

출처 - 목공예방 | 20세기의 디자인의 서막을 알린 만능 디자이너, 피터 베렌스(Peter Behrens) - Daum 카페

 

 

 

 

 

 

 

 

 

 

4.  국제 스타일의 간략한 역사

 김태환  2023. 3. 19. 9:50
 
 
 

 

 

사람들이 모더니즘 운동 전체를 묘사할 때, 그들은 우리 도시의 많은 스카이라인에 점점이 찍힌 강철과 유리 고층 건물, 또는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출현한 국제 스타일을 폭넓게 언급한다. 인터내셔널 스타일은 모든 규모의 공간 사용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에 영원히

영향을 미칠 기술과 산업의 진보와 사회 구조의 부흥을 상징했다. 전체주의 정부를 향한 발언을 하려는 정치적인 비난을 받은 건물로 종종 설계되었으며,

스타일에 영향을 준 많은 건축가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으로 이주하여 20세기에 가장 상징적인 건물과 고층 빌딩들이 지어질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인터내셔널 스타일은 1900년대 초에 건축의 진보와 창고 유형학에 대한 관심에서 처음 생겨났다. 이러한 공간들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수용할 수 있는

통풍이 잘 되는 크고 통풍이 잘된느 방을 필요로 했으며, 사용을 나타내기 위해 최소한의 실내 및 외부 장식만 필요로 했다. 이 스타일을 개척한 유명한

건축가 한 명은 독일의 대형 터빈 공장을 설계한 피터 베렌스였다. 그의 제자 중 한 명이자 베렌의 수행의 제자인 르 코르뷔지에는 이러한 산업 구조와

기본적인 기하학적 형태에서 영감을 받았다. Corbusier는 그의 기하학적 예술과 구조적인 기둥들이 어떻게 크고 탁 트인 평면도에 길을 내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도미노 하우스 세트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나중에 이러한 아이디어를 필로티, 그린 루프, 프리 파사드, 프리 플랜, 그리고 수평 창이라는 그의

건축의 5가지 포인트 선언으로 발전시켰다. 코부시에는 자동차 개발과 산업화에도 관심이 많아 빌라 사보예 설계 과정에서 집은 살기 위한 기계라고

주장했다. Corbusier와 이 시대의 다른 건축가들은 산업 자재가 제공하는 기회와 효율성을 보고 유럽의 절실한 재건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유럽 국제 스타일의 정점은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리는 전시회인 바이센호프세이들롱의 개발과 함께 왔다. 루드비히 미에 반 데르 로에가 주최한

이 행사는 17명의 유명한 건축가들이 디자인한 21개의 서민 아파트 건물들을 선보였다. 대부분의 프로젝트는 예산을 크게 초과하여 그들이 봉사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감당 할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이 행사는 인터내셔널 스타일을 널리 홍보하고 미국으로의 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전쟁 후 인터내셔널 스타일의 많은 설립자들은 하버드, MIT, 그리고 IIT를 포함한 유명한 미국 대학의 건물을 디자인했다. 그들은 또한 경제 성장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에 그 스타일의 이상을 가르치고 전파하기 시작했다. Mies를 포함한 많은 건축가들은 뉴욕의 씨그램빌딩과 일리노이주의 Farnsworth House와

같은 프로젝트들로 그들의 상징적인 흔적을 빠르게 주요 도시에 남길 수 있었다. 인터내셔널 스타일은 크고 날렵한 유리 및 강철 구조물을

대량 생산과 제작방법을 사용하여 효율적이고 저렴하게 건설할 수 있게 되면서 미국에서 선호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건축

양식과 마찬가지로, 다른 아이디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디자이너들은 다른 감정적 반응을 일으키고 새로운 변형을 찾기 위한 방법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인터내셔널 스타일은 특히 높은 빌딩에서 비슷하고 쉽게 반복되는 것 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60년대에 건축

가들은 미스의 유명한 대사인 적은 것이 더 많다를 적은것이 지루하다로 바꾸면서 유리탑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널리 국제 양식으로 지어진

대형 건물들은 그들이 하고자 하는것, 즉 사람들의 삶을 더 좋게 만들고 사회적 경제적 기회를 증진시키는 것을 달성하지 못했다.

 

오늘날에도 인터내셔널 스타일의 영향과몸짓은 여전히 찾아볼 수 있으며, 특히 전 세계 초고밀도 도시에서 새로운 초고층 빌딩 건설이 활성화

되면서 더욱 그러하다. 오늘날 많은 디자인이 보다 형식적이고 산업화된 미학으로 돌아오고 있으며, 종종 현대 건축과 동의어가 되어가고

있으며,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에 대해 일률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출처 : https://www.archdaily.com/997425/a-brief-history-of-the-international-style?ad_campaign=normal-tag

 

 

 

 

 

 

 

 

 

 

5.  모더니즘 팩토리 이야기

 논라벨 매거진  2022. 11. 30. 8:00
 

모더니즘 팩토리 이야기

피터 베렌스가 설계한 AEG 팩토리, 대표적인 모더니즘 팩토리로 꼽힌다.

종교 중심의 유럽 사회가 19세기 산업혁명을 거치며,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은 소량 생산에서 대량 생산으로, 넓은 농토가 있는 교외에서 생산과 편의 시설에 접근성이 뛰어난 도시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공장은 산업혁명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꼽힙니다. 또한 현대 건축을 집대성한 '루트비히 미스 판 데어 로에'의 명언 "Less is more. (적은 것이 더 풍부하다.)"에 가장 적확한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장은 생산량 최적화 외에는 불필요한 요소를 모두 덜어냈기 때문이죠.

모더니즘이 우리의 미감에서 덜어낼 수 없는 시대, 대표적인 국내 모더니즘 팩토리를 모아보았습니다.

1. 맥심 플랜트

Coffe=Maxim의 공식을 완성(?) 시킨 맥심 플랜트는 서울의 중심 용산구 한남동에 위치한 카페와 문화공간, 공장을 융합한 맥심 브랜드의 플래그십 스토어입니다. 도심 속 공장이다 보니, 맥심 플랜트는 설계 단계에서 차분하고 보수적인 색깔로 디자인되었고, 5층과 6층, 물방울무늬의 스크린 창문이 핸드드립 커피의 기포 방울을 연상케 합니다.

지하 공간에 두 층 높이의 공간을 만들고 대형 커피 로스팅 기계를 두어 '공장'의 역할을 부여하였고, 방문객들이 로스팅 과정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점이 이 공간의 아이덴티티를 표상합니다.

2. 연희화학공장

충남 천안에 위치한 <연희화학공장>은 건축 단계에서 첫 번째 목표는 '좋은 환경을 공장으로 끌어들이는 것'으로, 모든 공간에서 자연과 호흡할 수 있는 '숨 쉬는 공장'을 목표삼았습니다. 그에 따라 생산동과 업무, 생활동에서 자연채광을 경험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고, 휴식을 위해 먼 거리를 이동하지 않도록 동선을 구획했습니다.

 

3. 소비코 프로페셔널

경기도 양주 홍죽산업단지에 위치한 소비코 프로페셔널은 음향 기기를 생산하는 공장입니다. 설계 당시 최우선으로 고려되던 사항은 기능적인 동선으로, 세분화된 동선이 겹치지 않으면서 벌어진 틈으로 빛이 담길 수 있도록 구획하였습니다. 공장 입구에 설치된 파란색 타일을 따라 내부로 진입하면, 부근에 캐노피가 형성하는 둥근 빛을 만나게 됩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빛을 통해 근무자로 하여금 일상의 시간을 인지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4. HK도약관

2015년 한국건축문화대상을 수상한 바 있는 HK도약관은 증축 당시, 공장 주변의 수려한 자연환경과 내부를 적극적으로 연결하는 방안을 모색하였습니다. 더불어 주변의 산지 지형을 변형하지 않고 그대로 두어 자연 지형에 순응하고, 기계 중심의 공간 구성이 아닌 인간 중심의 효율을 추구하였습니다. 자연 채광과 환기창, 자연 온습도 조절을 통해 쾌적한 환경을 조성하는데 주력하였습니다.

 

5. 에이프로젠 바이오 로직스 오송공장

에이프로젠 바이오 로직스 오송공장(이하 오송공장)은 HK도약관과 마찬가지로 2018년 한국건축문화대상을 수상하기도 하였습니다. 설계 당시 공장 어디에서나 주변에 위치한 공원을 조망할 수 있도록 연결 지었습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미술관을 짓는 것이 아니냐'라는 질문을 받았을 정도로 뛰어난 미감을 자랑하는 건축물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기능에 따라 가장 논리적인 외장 재료를 사용하였습니다. 건물은 우레탄 패널로, 지원 시설은 노출 콘크리트와 박판 세라믹, 스테인리스 스틸로 마감하였습니다.

사실 여러모로 미술관과 공장은 닮아있어 보입니다. 둘 다 동선의 건물이며, 단순한 형태를 구현할 수 있는 기능성 때문입니다.

Editor : 금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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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ㆍAEG 선풍기 모델 GB1

 danggan  2022. 8. 2. 8:36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ㆍ조선일보 연재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

페터 베렌스

AEG 선풍기 모델 GB1

1908년

뉴욕 근대미술관 소장

철제 본체와 황동 날개

28.6×27.3×15.3㎝

ㅡ선풍기의 조상님

이 세상 모든 선풍기의 조상님 같은 이 제품은 독일의 산업디자이너이자 기업정체성(CI) 전문가 페터 베렌스(Peter Behrens1868~1940)의 작품이다. 사실 당시에는 ‘산업디자이너’라는 직종은 물론이고 ‘CI’라는 개념도 없었다. 베렌스가 이들을 만든 것이나 다름없다.

미술대학을 나왔지만 화가로서는 변변치 않았던 베렌스는 1907년 전자기기 제조업체 아에게(AEG)의 예술자문을 맡으면서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영미에 비해 산업화에 뒤처졌던 독일에서 1883년 설립돼 전구와 엔진 등을 생산하던 아에게는 빠른 속도로 선진국과의 기술 격차를 따라잡았다. 이후 가전제품을 선보였지만, 세련된 이미지 없이 품질만으로는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는 없었다. 베렌스는 신의 한 수였다. 그는 벌집 모양의 육각형에 글자를 하나씩 넣은 회사 로고를 시작으로 제품 카탈로그 디자인에 열정을 기울였다. 무엇보다 아에게 서체를 개발하여 모든 홍보물에 일관성을 부여하고 다른 회사와 확실히 차별화했다. 그의 디자인 원칙은 무의미한 장식 없이 기능에 완벽히 부합하는 정확하고도 단순한 형태였다. 사용자 친화적이면서 동시에 효율적으로 대량 생산이 가능한 생산자 친화적인 가치 또한 아에게의 혁신을 주도했던 베렌스의 철학이었다. 그는 서체와 로고 같은 작은 데서부터 선풍기와 주전자 등 제품 디자인과, 공장을 비롯한 대규모 건축까지 주도하면서 ‘아에게스러운’ 단순성을 일관되게 유지했다.

묵직한 검은 본체, 반듯한 네 개의 황동 날개, 여덟 개의 살이 달린 둥근 커버는 자로 잰 듯 반듯해서 안정적이면서도 아름답다. 물론 요즘 같은 무더위에 선풍기는 존재만으로도 매우 아름답지만.

피터 베렌스ㆍPeter Behrens

현대 디자인의 주요 선구자

독일의 건축가이자 광고 전문가

 

 

베렌스는 1906년에서 1907년까지 AEG(Allgemeine Elektrizitäts Gesellschaft)의 예술 고문직을 맡았다.

그곳에서 그의 책임은 그 회사가 관련하는 건물과 생산하는 제품의 전기 가전 제품을 디자인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소비되는 대량 생산 제품을 디자인 했기 때문에 그는 최초의 산업 디자이너로 인정 받고 있다.

다름슈타트 베렌스의 집

 

 

 

 

 

 

 

 

 

 

 

 

7.  독일공작연맹 [Deutscher Werkbund]

이종국 2010. 1. 12. 

 

1907년 뮌헨에서 창설된 최초의 예술가 조직.
 
대량생산품과 건축을 위해 좋은 디자인과 기술을 장려하려 애썼고, 건축물을 비롯하여 산업·상업·가정용품을 디자인하는 예술가·숙련공·건축가로 구성된 영향력이 큰 단체이다.
 
지도자인 건축가 헤르만 무테지우스와 앙리 반 데 벨데(벨기에)는, 19세기 영국의 미술공예운동을 일으켜 산업공예를 디자이너와 공예가들의 공동사업으로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한 윌리엄 모리스의 영향을 받으며 그의 생각을 기계생산품까지 확대시켰다.
또 장식성을 배제한 기능위주의 형태성을 주장하였다.
창설된 후 곧이어 연맹은 2파(派)로 나뉘는데 무테지우스 일파가 기계대량생산과 디자인 표준화의 효용성을 주장한 반면 반 데 벨데파는 예술가의 개인성에 가치를 두었다.
결국 연맹은 1914년 쾰른에서 열린 연례회의에서 무테지우스의 입장을 채택했다.
 
독일공작연맹은 곳곳에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켜 오스트리아의 오스트리아 공작연맹(1912), 스위스의 스위스 공작연맹(1913) 등 비슷한 조직이 생겨났고 1915년 스웨덴 공예가조합이 이 취지에 따라 조직을 변경했으며, 독일공예가연맹을 본떠서 영국 디자인 산업협회(1915)도 창설되었다.
연맹의 영향력은 쾰른에서 열린 산업미술 및 건축전시회(1914)를 계기로 더욱 커졌다.
전시된 건물들 중에는 강철·콘크리트·유리를 사용한 근대 건축의 가장 유명한 본보기가 되는 반 데 벨데의 극장, 발터 그로피우스의 관청건물, 도이츠 기계공장 파빌리언 및 차고가 포함되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연맹의 활동은 잠시 중단되었지만, 종전 후 슈투트가르트에서 의미있는 전시회(1927)를 열어 자신의 존재를 재확인했다. 독일 건축가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가 주관한 이 전시회는 그당시 유럽의 일반 주택 건축의 발전을 요약하고 있었다.
무테지우스의 사상을 받아들인 미스,그로피우스, 르 코르뷔지에와 같은 전시참가 건축가들은 고도로 표준화된 재료와 디자인으로 대규모 주택을 값싸게 지을 수 있게 해주었다.
 
1930년 그로피우스가 파리에서 열린 산업예술과 건축전시회에서 라슬로 모호이 노디, 마르셀 브로이어, 헤르베르트 바이어와 함께 주관했던 공작연맹작가 전시품은 그 가치(재료와 디자인의 표준화를 통한 대단위 주택)가 드높게 인정되고 재강조되는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독일 나치정권이 등장한 1933년 연맹은 해체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후 되살아났다.
 
 
바이젠 호프 주거단지 (Weissenhoff Siedlung,Weißenhofsiedlung)

독일의 중부 지방도시 슈투트가르트 근교에 위치한 바이젠호프 언덕에는 새로운 건축 운동의 일환으로 세워진‘독일 공작 연맹’의 실험주택이 있다.

‘독일 공작 연맹’은 1927년경 건축가와 예술가, 그리고 실업가들이 모여 독일 공업디자인의 수준을 향상시키고 예술과 공업을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태동한 모임으로 이들은 독일 근대건축 전개에 중요한 활동을 했다.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 고통받던 당시의 국내 사정으로 본다면 이 같은 대규모 주택단지를 짓는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독일 공작연맹에서는 개인주택들과 공동주택단지의 건설을 밀어붙였고 건축가와 예술가, 실업가들의 노력에 의해 바이젠호프 주거단지 계획은 성공할 수 있었다. 

그 후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바이젠호프의 성공에 자극을 받아 이와 비슷한 계획을 추진했다.

지금까지도 바이젠호프의 주거단지가 그 빛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당시의 젊은 건축인들에 의해 주도되고 실현된 건축의 미래와 비전 덕분이다.


이 주거단지는 모두 33개의 거주 단위로 이루어져 단일 주택과 24세대가 입주하는 아파트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 단지 계획은 미스 반 데로(Mies Van der Rohe)가 중심이 되어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와 잔 네레, 네덜란드의 우트, 그리고 독일의 피터 베렌스와 발터 그로피우스를 포함하여 빅토르 부르주아, 부루노 타우트, 아돌프 라딩, 요제프 프랑크 등 당대 유명했던 건축가 17명으로 이루어졌다. 

 

 

 

 

 

출처 - [독일]-독일공작연맹 [Deutscher Werkbund] (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