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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실 ■/스크랩 - 세계의 건축가

세계의 건축가 -081. 오귀스트 페레 Auguste Perret

1.  건축가 오귀스트 페레 Auguste Perret

 

출생  1874. 2. 12, 브뤼셀 근처
사망  1954. 2. 25,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건축가.

 

철근 콘크리트 건축의 표현기법을 개발하는 데 선구적으로 이바지한 인물로 유명하다.

그의 아버지는 본래 석공이었으나 1881년 이후 파리에서 건축도급업자로 활발한 사업을 한 클로드 마리 페레이다. 오귀스트 페레는 파리에 있는 에콜데 보자르에서 건축을 공부했으나 학위를 받기 전에 학교를 그만두고 아버지의 사업에 참여했다. 1903년 형제인 귀스타브, 클로드와 함께 파리의 프랑클랭가(街) 25번지에 아파트를 건축했는데, 이 아파트는 철근 콘크리트 구조를 사용한 최초의 아파트로 여겨진다.

 

1905년에 퐁티외가에 만든 차고는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 구조 지지물을 최소화함으로써 실내 공간을 얼마나 밝고 널찍하게 만들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이 건물의 노출 골구조는 구조적 솔직함에 대한 그의 관심을 나타낸다. 이러한 노출 골구조는 샹젤리제의 파리 극장(1913) 내부의 눈에 띄는 특징이기도 하다. 카사블랑카에 있는 물품창고(1915)에서는 얇은 셸 구조의 볼트 지붕을 사용했고, 파리에 있는 의류공장(1919)에서는 우아한 콘크리트 아치를 사용했다. 파리 근처 르랭시에 지은 노트르담 교회(1922~23)가 널리 인정받음으로써 전혀 새롭고 진보적인 그의 건축 개념과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한 거대 구조의 가능성이 완전히 입증되었다.

 

1920, 1930년대에 중요한 작품을 많이 만들었는데 그 가운데는 음향학적 걸작으로 간주되는 파리 음악고등사범학교(1929)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르아브르 재건설의 책임 건축가로 임명되었다. 이곳에 만든 건축물 중에서는 시청사와 생조제프 교회가 유명한데 두 작품 모두 1950년에 설계해 죽기 전에 완성했다.

당시 그는 많은 젊은 건축가들의 이상과 첨예한 갈등을 겪고 있었는데, 이들은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한 구조 체계의 표현보다는 철근 콘크리트의 사용으로 다양하게 구사할 수 있는 공간적·조소적(彫塑的) 효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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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다음백과 | Daum 

 

 

 

 

 

 

 

 

 

 

 

2.  르 아브르, 오귀스트 페레가 재건한 도시

 

  • 제목 : 르 아브르, 오귀스트 페레가 재건한 도시

  • 설명 : © UNESCO / Author : Francesco Bandarin

상세정보

  • 국가 : 프랑스(France)

  • 위치 : 오트노르망디 주(Haute-Normandie) 센마리팀 현(Seine-Maritime)

  • 좌표 : N49 29 34.008, E0 6 27

  • 등재연도 : 2005년

 

요약

르 아브르는 노르망디 북부 영불해협에 있는 도시로 제2차 세계 대전 때 심한 폭격을 받아 대부분 파괴되었다가 1945년~1964년에 걸쳐 재건되었다. 건축가 오귀스트 페레(Auguste Perret, 1874~1954)는 옛 도시 형태와 역사적 구조물을 잘 보존하면서도 새로운 형태의 도시 계획과 건설 기술을 활용하여 행정·상업·문화 중심지로 재건하였다. 재건된 르 아브르 시는 통일적인 방법론과 조립법의 사용, 모듈 단위 시설망의 체계적인 사용, 콘크리트의 활용 등에서 전후 도시 계획과 건축의 대표적인 사례로 인정받는다.

 

영문명

 

Le Havre, the City Rebuilt by Auguste Perret

 

등재기준

기준 (ⅱ) : 전후 르 아브르의 재건 계획은 도시의 전통과 현대 건축을 잘 조화시켰으며, 건축, 기술, 도시 계획에서 현대적인 발전을 이룬 개척자적인 성취로 인정받고 있다.

기준 (ⅳ) : 르 아브르는 통일적인 방법론, 조립법의 사용, 모듈 단위 시설망의 체계적인 사용, 콘크리트의 잠재력을 과감하게 활용한 점 등에서 통일성과 완전성을 갖춘 전후 도시 계획과 건축의 대표적 사례이다.

 

역사적 배경

센 강 어귀에 있는 르 아브르는 루앙, 파리 등 내륙으로 접근하기 좋은 전략적인 요충지였다. 강어귀와 늪지 때문에 16세기(1517)에야 루앙으로 연결되는 항구 건설이 결정되었다. 유럽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으로 르 아브르 항구는 그 중요성을 다시 인정받았고, 1541년 프랑수아 1세가 시에나의 건축가 J. 벨라르마토에게 항구를 확장하는 임무를 맡겼다. 이 지역은 생프랑수아의 본부로, 르네상스식 그리드 플랜(grid plan)에 의해 설계되었다. 17세기에도 르 아브르 항구는 아메리카, 아프리카와의 무역항으로 계속 발전했다. 한편 콜베르 수상은 무기고를 건설하고 군함 조선소를 페리 지역으로 이동하도록 지시했다. 1779년에 라파예트가 미국과 전쟁하기 위해 군대를 출발시킬 때도 르 아브르 항구를 이용했다.

18세기 말에 르 아브르는 프랑스 4대 항구 중 하나가 되었다. 1786년에 공학자 프랑수아 로랑 라만데(François-Laurent Lamandé)에게 새로운 도시 계획을 위임했으나, 프랑스 혁명으로 1830년에야 완공되었다. 1847년에는 파리에서 루앙과 르아브로로 가는 철도가 개통되어 르 아브르의 역할이 더욱 강화되었다. 1852년에 옛 요새들이 허물어지면서 도시 지역은 아홉 배로 늘어났고, 인구는 60,000명에 이르렀다. 중요한 대서양횡단교통 회사들이 르 아브르에 설립되어 산업 발전을 촉진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도심 지역의 인구는 190,000명에 이르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영국군이 상륙해 르 아브르 항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며, 1940년 5월에 독일군에게 폭격당하면서 영국군이 패퇴했다. 강화조약이 체결된 뒤 독일군이 이곳을 점령했고, 르 아브르는 영국군을 공격하기 위한 발판으로 사용되었다. 그로 인해 르 아브르 항구는 영국군의 폭격을 받아 특히 조선소들이 파괴되었다. 이후 르 아브르는 1944년 9월까지 계속 연합군의 공습을 받았으며 마침내는 중심 지역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처럼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도시가 계속 파괴되면서 르 아브르 재건 계획이 싹트게 되었다. 1944년 여름, 당시 70세였던 오귀스트 페레는 건축가동맹 그룹과 함께 르 아브르의 재건 사업을 이끌어 나갔다. 페레는 보자르 학교에서 연구했지만 졸업하지는 못했는데, 가문의 사업을 이어받아야 했으므로 청부업자로 일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전주의 정신과 19세기 기술 발전의 유산을 물려받은 페레는 강화 콘크리트 기술의 발전에서 확실한 경험을 했으며, 초기에 그가 설계한 파리 프랭클린 거리의 공동주택(1903), 랭시의 노트르담 성당(1923) 등은 초기 모더니즘의 걸작으로 인정받았다.

토양 상태와 높은 배수구를 고려하여 르 아브르는 지표에서 3.5m가량 높은 곳에 강화 콘크리트 지반 위에 전 도시를 건설할 계획이었다. 당시 이것은 건물의 하부구조를 이용하려는 혁명적인 창안이었다. 전후 시멘트와 철강의 부족으로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전체적인 마스터플랜은 수행되었다. 사업은 기본적인 격자 모듈 6.24㎡에 기초하였다. 부지는 100m 배관망 위에 놓였고 일부는 더 큰 부지를 만드는 데 연결되었다. 건설 사업은 1964년 성 요셉 교회가 봉헌되면서 완료되었다.

 

유산면적

 

133ha

 

완충지역

114ha

 

참고번호

1181

 

본문

센 강 어귀에 있는 르 아브르는 루앙·파리 등 내륙으로 접근하는 데 전략적 요충지였다. 강어귀와 늪지 때문에 루앙을 위한 항구를 건립하는 결정은 1517년에야 내려졌다. 유럽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의 결과, 르 아브르 항구는 다시 중요성을 인정받았고 1541년 프랑수아 1세가 시에나의 건축가 벨라르마토에게 항구를 확장하는 임무를 맡겼다. 생 프랑수아의 본부는 르네상스식 배관망 기획에 따라 설계되었다. 17세기에도 르 아브르(항구)는 계속해서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와 상업적 교류를 발전시켰다.

르 아브르는 제2차 세계 대전 때 항만과 시가지가 파괴된 후, 오귀스트 페레의 지휘로 1945년~1964년에 재건 계획이 실현되면서 도시가 살아났다. 이곳에 행정, 상업, 문화 중심지가 들어섰고, 그 결과 건축, 기술, 도시 계획에서 현대적인 발전을 이루며 개척자로서 업적을 인정받았다. 이는 조립 체계와 방법론의 통일성, 모듈 단위 시설망의 체계적인 사용, 콘크리트의 잠재력을 혁신적으로 활용한 점 등에 기초하고 있다. 이후 르 아브르의 재건 계획은 도시 계획 전통의 이정표가 되었다.

르 아브르 재건 계획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고안되었다. 오귀스트 페레는 에콜데보자르에서 공부하며 고전주의 정신을 훈련받은 사람으로, 19세기 기술 발전의 유산을 물려받았다. 페레의 초기 건축 설계 가운데 파리 프랭클린 거리의 공동주택(1903), 랭시의 노트르담 성당(1923) 같은 건물은 초기 모더니즘의 걸작으로 인정받아 왔다.

르 아브르 재건 계획은 토양 상태와 높은 배수구를 고려하여, 지표에서 3.5m가량 높은 곳에 강화 콘크리트 지반을 만들고 그 위에 도시를 건설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었다. 당시에 이것은 건물의 하부 구조를 이용하려는 혁명적인 창안이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종합 계획은 실행에 옮겼지만, 시멘트와 철강 부족으로 콘크리트 하부구조 계획은 법적 실행력을 확보하지 못하였다. 이 사업은 기본적인 격자 모듈 6.24㎡에 기초하여 100m 격자망 위에 부지를 만들고 일부는 더 큰 부지를 만드는 데 연결되었다.

르 아브르 재건 사업은 통일성과 조화로움을 창조하려는 건축가의 이상에 따라 진행되었고, 모든 세부 구조를 같은 패턴으로 설계하여 도시 규모에서 일종의 종합 예술을 창조하였다. 페레는 가장 중요한 공공건물들을 그의 개인적인 설계 계획으로 남겨 두었으며, 폭격으로 파괴되지 않은 몇몇 건물들을 새로운 도시 구조의 일부로 자리 잡도록 했다. 생 프랑수아 본부도 파괴되었지만, 역사적인 건물들 중 일부는 당당히 제자리를 지키며 1946년에 보호 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이로 인해 이 지역의 도시 계획은 주로 옛 거리를 유지, 복원하는 형태에 기초했다.

센 강 어귀에 있는 르 아브르는 루앙, 파리 등 내륙으로 접근하기 좋은 전략적인 요충지였다. 강어귀와 늪지 때문에 16세기(1517)에야 루앙으로 연결되는 항구 건설이 결정되었다. 유럽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으로 르 아브르 항구는 그 중요성을 다시 인정받았고, 1541년 프랑수아 1세가 시에나의 건축가 J. 벨라르마토에게 항구를 확장하는 임무를 맡겼다. 이 지역은 생 프랑수아의 본부로, 르네상스식 그리드 플랜(grid plan)에 의해 설계되었다. 17세기에도 르 아브르 항구는 아메리카, 아프리카와의 무역항으로 계속 발전했다. 한편 콜베르 수상은 무기고를 건설하고 군함 조선소를 페리 지역으로 이동하도록 지시했다. 1779년에 라파예트가 미국과 전쟁하기 위해 군대를 출발시킬 때도 르 아브르 항구를 이용했다.

건물 디자인과 광장들은 정사각형인 6.24㎡ 모듈을 바탕으로 건설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시에 음악적인 조화로움을 선사하였다. 주민들의 평균 밀도는 1㏊당 전쟁 전의 2,000명에서 800명으로 줄어들었다. 도시의 정신은 신고전주의에 기반을 두면서 블록 단위로 구획되긴 했지만, 거리는 예전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페레의 재건 사업은 구조 설계에 가장 큰 특징이었으며, 특히 강화 콘트리트 재료를 아방가르드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를 포토 달(poteau dalle)이라고 하는데, 구조를 모듈화하고 완전히 투명하게 해서 모든 구조 요소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해주는 구조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 모든 건축에 지배적인 특성과 특정한 통일성을 부여하게 되고, 이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지루하지 않도록 솜씨 있게 활용된다.

르 아브르 도시의 포르트 오상(Porte Océane)은 포크 거리로 들어가는 기념비적 입구로, 바다에서 도시로 들어가는 입구이기도 하다. 전쟁 때 파괴된 옛 정문에서 아이디어를 따온 포르트 오상은 건설 사업의 구조 체계와 건설 방식의 발전에 도움을 주는 실험적인 ‘연구소’가 되었다. 생 로크 광장은 옛 공원과 묘지 자리에 위치하며 새로운 디자인에 대한 방향성을 주고 있다. 오텔 드 빌(The Hôtel de Ville, 시청사)은 전체적으로 가장 기념비적 구조이며 그 중앙부에는 높이 70m의 18층짜리 탑이 우뚝 서 있다.

 

관련이미지

 

 

출처 - 르 아브르, 오귀스트 페레가 재건한 도시 – 유네스코와 유산 (unesco.or.kr)

 

 

 

 

 

 

 

 

3. 인상파 인상주의가 탄생한 프랑스 르아브르 가볼만한 곳 앙드레 말로 현대미술관과 레 뱅 데 도크

 뮤지끄  2023. 6. 7. 18:30
 

<세계 미술여행> 13편 : 인상파 인상주의가 탄생한 프랑스 르아브르 가볼만한 곳 앙드레 말로 현대미술관과 레 뱅 데 도크

지난 6편에서 인상파가 탄생한 곳으로 옹플뢰르(Honfleur)라는 프랑스의 작은 항구도시를 소개해었다.

인상주의의 첫 작품인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인상, 해돋이( Impression, soleil levant)>가 옹플뢰르와 르아브르(Le Havre) 사이의 풍경을 그린 것이었다.

정확히는 르아브르 항구에서 옹플뢰르를 바라보며 그린 것이니 인상주의가 탄생 한 곳을 르아브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자료를 찾아보면 옹플뢰르는 언급하지 않고 르아브르만 얘기하는 사람들도 많다.

아무튼 옹플뢰르와 르아브르는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르아브르, 출처 : Getty Images

대항해시대 이후 옹플뢰르가 번창하기 시작했지만 도시를 확장하는데 한계가 있었기에 센 강 건너편에 새로 만든 항구도시가 바로 르아브르였다.

그리고 르아브르 항구가 번성하면서 반대로 옹플뢰르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옹플뢰르

그런데 오히려 옹플뢰르가 쇠퇴한 덕분에 더이상 개발하지 못하고 옛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있게 되어 아름다운 옹플뢰르 풍경을 유지하게 되었으니 옹플뢰르와 르아브르는 마치 애증의 관계와도 같이 서로 여러 영향을 주고받은 것이다.

많은 화가들이 옹플뢰르를 찾아 작품활동을 하였듯이 르아브르 역시 많은 화가들이 그림이 그리기 위해 찾아올 정도로 못지않게 아름다웠다.

출처 : Ludovic Maisant - OT Le Havre


가볼만한 곳

앙드레 말로 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 André Malraux)

앙드레 말로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소설가로 그가 문화부 장관으로 재임하던 1961년 르아브르에 미술관을 설립하였다.

출처 : Viator

설립 초기에는 르아브르와 인연이 깊은 화가들의 전시를 중심으로 하였으며 이후 작품의 범위를 점차 넓혀나갔다.

 

Claude Monet

Les Nymphéas

1904

클로드 모네의 <수련>을 비롯해 다양한 모네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외젠 부댕(Eugène Boudin),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라울 뒤피(Raoul Dufy) 등 대표적인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운영시간 : 오전 11 :00 ~ 오후 6 :00 (토요일과 일요일은 오후 7:00까지, 매주 월요일 휴관)

입장료 : 성인 기준 10유로

전화번호 : +33235196262

주소 : 2 Bd Clemenceau, 76600 Le Havre, France


레 뱅 데 도크(Les Bains des Docks)

르아브르는 세계 2차대전 동안 폭격을 맞으면서 도시의 80%가 손상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르아브르의 모습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화가들이 찾아오던 그때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출처 : Patrice Le Bris - OTAH

종전 이후 국가 주도의 재건 프로젝트에 오귀스트 페레(Auguste Perret)를 비롯한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참여하면서 르아브르는 콘크리트의 미학을 품은 도시로 재탄생하였다.

오늘날에는 ‘바다의 맨해튼’ 이라 불리며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지역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가 되었다.

레 뱅 데 도크는 총 면적이 5,000㎥에 달하는 수영장으로 콘크리트의 미학에 어울리는 직각의 인테리어와 흰색으로만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16세기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는 옹플뢰르와 대조해서 볼만 하다.

출처 : Dezeen

테라스와 미끄럼틀 등이 조성되어 미적 환경을 함께 구축하였으며, 영국의 일간지 <텔레그래프>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쿨한 수영장’으로 선정하기도 하였다.

현재는 임시 휴업 중으로 개보수 및 현대화 등을 거쳐 올해 9월 재개장할 예정이다.


전화번호 : +33232792955

주소 : Quai de la Réunion, 76600 Le Havre, 프랑스

 

출처 - 인상파 인상주의가 탄생한 프랑스 르아브르 가볼..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4.  벽이 뚫려 있어도 건물은 왜 무너지지 않을까 – 현대 건축의 아버지 르 코르뷔지에

 

2022.02.15
 

프랑스 파리에서 동쪽으로 약 13km 정도 떨어진 도시 르랑시(Le Raincy)에는 독특한 외관의 성당이 하나 있습니다. 세월의 흔적으로 인해 거뭇거뭇해진 갈색 혹은 회색을 띠는 유명한 유럽 도시의 여느 고딕 성당들과는 달리 이곳 르랑시 성당(Church of Notre Dame du Raincy)의 차가운 회색 벽의 조금은 더 현대적인 모습입니다.

 

사진: Jacques Mossot (structurae.net)

근 콘크리트의 아버지, 오귀스트 페레

1923년에 세워진 이 현대적인 모양의 성당은 철근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성당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군인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는 르랑시 성당은 근대 철근콘크리트 건축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오귀스트 페레(Auguste Perret)가 설계한 건물입니다. 오귀스트 페레는 철근콘크리트를 근대 건축물에 본격적으로 도입했다고 알려진 건축가이죠.

 

오귀스트 페레 (사진: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강화콘크리트라고도 불리는 철근콘크리트(reinforced concrete)가 사용된 역사는 사실 200년도 넘지 않습니다. 시초는 19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프랑스의 한 정원사 조제프 모니에(Joseph Monier)는 점토로 만든 도자기 화분이 자꾸 깨지는 현상을 개선하기 위해 콘크리트를 사용해 화분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갈라지는 현상은 여전히 발생했죠. 이때 그는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립니다. 콘크리트 안에 철망을 삽입해 뼈대를 만드는 겁니다. 이렇게 철근콘크리트의 시대는 프랑스의 한 정원사의 손에서 시작됩니다.

모니에는 이후 철근콘크리트를 이용해 만든 화분이나 수조, 교량 등 여러 제품의 특허를 냈지만, 잠재력으로 가득한 이 재료를 건축에도 활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아직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19세기 후반, 여러 건축가에 의해 연구되던 철근콘크리트는 20세기 초반이 되어서야 오귀스트 페레의 손에 의해 건축 양식에서도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오귀스트 페레는 파리의 프랭클린가 25번지에 있는 최초의 철근콘크리트 아파트, 샹젤리제 극장, 르랑시 성당 등을 지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폭격으로 인해 파괴되었던 도시 르아브르(Le Havre) 재건에 힘썼습니다.

페레에 의해 “재건된 르아브르 시는 통일적인 방법론과 조립법의 사용, 모듈 단위 시설망의 체계적인 사용, 콘크리트의 활용 등에서 전후 도시 계획과 건축의 대표적인 사례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프랭클린가 25번지 아파트 (사진: Wikimedia Commons, CC BY 2.0)
샹젤리제 극장 (사진: Wikimedia Commons, CC BY 3.0)

 

그러던 1907년의 어느 날, 오귀스트 페레의 건축 사무소에 인턴이 한 명 들어 옵니다. 이는 훗날 20세기 건축사를 이끄는 인물 중 하나가 됩니다. 바로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입니다.

현대 건축의 아버지, 르 코르뷔지에

현대 건축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코르뷔지에는 기존의 적조식 건축법에서 철근콘크리트를 활용하는 현대적 건축으로 양식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우리가 지금 떠올리는 아파트라는 건물 형태를 가장 먼저 확립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코르뷔지에의 본명은 샤를 에두아르 잔레그리(Charles-Édouard Jeanneret-Gris). 1920년 가명으로 기사를 쓰기 시작하면서 ‘르 코르뷔지에’라는 가명을 쓰기 시작했죠. 스위스에서 태어나 시계를 만들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시계와 공예를 배우던 그는 학교 선생님의 추천으로 건축에 입문합니다. 젊은 시절 유럽 이곳저곳을 여행하던 그는 1907년 오귀스트 페레의 건축 사무소에 인턴으로 취업했고, 당시 페레에게 배운 철근콘크리트 활용법은 이후 그의 건축 양식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의사에게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있다면 현대 건축가에게는 코르뷔지에의 근대 건축 5원칙이 있습니다.

필로티 – 흔히 볼 수 있는 빌라의 1층을 생각하면 됩니다. 2층부터 주거 공간이 시작되며 1층에는 기둥만 있어 주차장으로 활용하는 형태가 대다수이죠. 요는, 필로티로 건물을 지상에서 들어 올려 정원을 확대해 아래 공간까지 활용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옥상 정원 – 과거에는 빗물을 흘려보내기 위해 옥상에 경사를 두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철근콘크리트를 사용하면서 건물의 강도는 높이면서 방수도 가능해져, 활용도가 높아진 옥상을 정원과 같은 형태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유로운 파사드(입면) – 과거에는 벽이 건물 전체를 지탱했습니다. 벽이 무너지면 상부의 무게를 지지할 수 없으므로 건물도 무너졌죠. 하지만 철근콘크리트로 만든 기둥으로 건물을 지지할 수 있게 되면서 모든 벽을 막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덕분이 입면 디자인이 자유로워졌죠.

자유로운 평면 – 비슷한 맥락에서 철근콘크리트 덕분에 건물 내부 평면을 자유롭게 구성할 수 있게 되었고 더불어 미적 요소를 더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로로 긴 창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벽이 건물을 지탱하던 과거에는 창을 세로로 길게 내야 했습니다. 가로로 길게 내면 벽의 지지력이 약해져 무너졌을 테니까요. 하지만 벽을 뚫을 수 있게 되면서 창문도 가로로 길게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코르뷔지에의 근대 건축 5원칙을 모두 반영해 처음 세운 건물이 바로 빌라 사보아(Villa Savoye)입니다.

 

(사진: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프랑스 문화유산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된 빌라 사보아는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건물 중 가장 유명하고 많은 사랑을 받는 건물 중 하나입니다. 파리 외곽의 푸아시(Poissy)에 있는 빌라 사보아는 필로티 구조로 1층은 주차장으로 사용할 수 있으며, 옥상에는 외부에 노출된 테라스가 있습니다. 이 외에도 자유로운 입면/평면, 가로로 긴 창까지 다섯 가지 요소가 모두 집약되어 있습니다.

 

사진: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또한 빌라 사보아에는 코르뷔지에의 도미노(Dom-Ino) 하우스 설계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라틴어의 집(Domus)와 혁신(Innovation)의 합성어입니다. 최소한의 철근콘크리트 기둥이 모서리에서 상부를 지탱하고 평면 한쪽에 계단을 만드는 아래 그림과 같은 개방적인 설계를 의미하는 도미노 구조는 지금이야 새로울 것 없이 익숙한 형태이지만, 이 이론이 등장한 당시에는 굉장히 혁신적이 구조였습니다.

 

도미노 하우스 설계도 © FLC/ADAGP

 

코르뷔지에는 20세기 중반 오늘날 우리가 떠올리는 아파트 형태를 창시하며 새로운 주거 형태를 선보인 선구자이기도 합니다. 프랑스 마르세유에 있는 유니테 다비타시옹(Unité d’Habitation)이라는 아래의 건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세워진 건물입니다. 전쟁으로 인해 도심은 폐허가 되고 주거지가 파괴되어 주택난이 심각해지면서 프랑스 정부는 주택공급에 힘을 쏟았고 그 과정에서 코르뷔지에의 건축 철학이 반영되어 나온 것이 바로 유니테 다비타시옹입니다. 총 337세대가 거주할 수 있는 이 건물은 물론 철근콘크리트로 만들어졌으며, 옥상에 있는 테라스에는 운동, 일광욕 등을 즐길 수 있는 오픈 공간이 있습니다.

 

마르세유에 있는 유니테 다비타시옹 © FLC/ADAGP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코르뷔지에가 세운 모듈러 이론(modulor)이 적용된 초기 건물이기도 합니다. 모듈러 이론은 코르뷔지에가 건축에 조화와 비례를 적용하기 위해 정립한 이론입니다. 가령 집 안에서 팔과 다리를 뻗어 춤을 추든 스트레칭을 하든 가장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는 수치, 즉 인간의 신체 사이즈와 건축물 사이의 황금비율을 정해 이를 기반으로 건축물을 만든 겁니다. 오늘날 아파트의 기본 천고가 2.3m인 것도 코르뷔지에의 모듈러 이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당시 그가 기준으로 삼았던 183cm 키의 성인이 손을 들었을 때 손끝 높이가 226cm였기 때문이죠. 모듈러 이론을 더 자세하게 알아보고 싶다면 그의 저서 <모듈러>에도 상세히 나와 있으니 참고해보시면 좋겠습니다.

 

코르뷔지에가 고안한 모듈러 이론 © FLC/ADAGP

 

이 외에도 코르뷔지에의 건물은 독일의 바이센호프 공동주택, 인도 찬디가르 국회의사당, 일본의 도쿄 국립서양박물관 등 세계 곳곳에 퍼져 있습니다. 그리고 2016년, 세 건축물을 포함한 17개의 건물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죠. 그중에서도 프랑스에 있는 롱샹 성당(Chapelle Notre-Dame-du-Haut)은 직선을 강조해왔던 과거 건축물과는 달리 마치 가우디의 그것처럼 자연적인 곡선 요소를 넣은 것이 눈에 띕니다.

 

롱샹성당 (사진: Foundation Le Corbusier)

 

미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죠. 가우디처럼 자연적인 요소와 곡선을 더 중시했던 사람이 있는 반면 코르뷔지에처럼 논리와 합리성, 직선을 미의 기준으로 삼았던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미의 기준은 무엇인가요?

 

출처 - 벽이 뚫려 있어도 건물은 왜 무너지지 않을까 – 현대 건축의 아버지 르 코르뷔지에 – SAMPYO (beeclover.pro)

 

 

 

 

 

 

 

 

 

 

5. 르 아브르(Le Havre), 500년 역사를 문화축제로 기념하다

  • 기자명 아츠앤컬쳐 
  •  입력 2017.07.06 00:00
  •  수정 2020.12.09 14:57
VINCENT GANIVET - © ERIK LEVILLY / VILLE DU HAVRE

 

[아츠앤컬쳐] 프랑스의 북부에 위치한 항구도시 르 아브르(Le Havre)가 도시탄생 500년을 기념하고자 대대적인 문화예술축제를 열었다. 여름에도 가끔 선선한 바람이 부는 노르망디 지역의 이 도시는 인구 175,000여 명의 해변도시이다. 주변의 도빌해협이나 옹플레르에 비해서 관광객들에게 뒷전이었던 아브르가 이번 축제를 계기로 무궁무진한 가능성과 희망으로 재조명받고 있다. 5월말 개막식에 이어 프랑스 및 유럽 주요 언론들이 앞다투어 행사 소식을 전하면서 올여름 핫한 피서지로 새롭게 등극했다.

JULIEN BERTHIER - LOVE LOVE -©ERIK LEVILLY / VILLE DU HAVRE

 

낯선 도시 풍경, 여기 프랑스 도시 맞아?
프랑스의 도시풍경하면 흔히 고풍스런 건축물로 잘 정돈된 풍경을 떠올릴 것이다. 100년이 넘는 건축물은 기본이고 중세시대의 건축물에서 거주하는 일도 익숙하다. 그런데 예외인 도시가 있다. 바로 아브르이다. 이 도시는 2차세계대전 당시 도시 전체가 폭격을 맞아 황폐해졌다. 이후 1945년부터 1964년까지 대대적인 재건 프로젝트
로 아브르는 새롭게 태어났다.

아브르 도시전경

이 과정을 총괄한 이가 바로 프랑스의 건축가 오귀스트 페레(August Perret)이다. 콘크리트 건축가라는 별명이 따라다닐 정도로 그는 소재와 양식면에서 기존의 프랑스 건축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을 선보였다. 이처럼 장식적인 측면이 배제된 기능성을 강조한 간소화된 직선 건축물은 다소 차갑다거나 지루한 느낌을 준다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반면 혹자는 페레야말로 진정 혁신적인 건축가였다고 높게 평가한다. 참고로 파리의 명소인 샹젤리제 극장의 건축가가 바로 페레이다. 아브르는 전후 재건 도시의 모델로 평가받으며 2005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KAREL MARTENS - © PHILIPPE BREARD// VILLE DU HAVRE

 

시민들이 참여한 예술축제
〈아브르의 여름(Summer in Havre)〉이라는 제목으로 개최된 이번 축제는 도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홍보담당자 앙트완이 설명하기를 아브르시민들의 관광객과 외부인을 대하는 태도가 변하는 것을 이번 행사를 준비하는 동안 느꼈다고 한다. 처음에는 다소 무심했던 시민들의 태도가 이제는 적극적으로 안내를 하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아브르시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번 축제에서 화제가 된 프로젝트 중 하나인 해변가의 캬반느(개인 캐비넷)의 일화가 흥미롭다. 네덜란드 그래픽 아티스트인 카렐 마르텐스는 캬반느 소유주들의 참여로 그들의 캬반느에 알록달록 색을 입혔다. 마치 컬러띠를 두른 듯한 캬반느들이 여러 개 어우려져 멀리서 보면 경쾌한 리듬감을 느낄 수 있다. 열 개의 색상을 고르기 위하여 아브르 대학교 연구실과 함께 1517년 프랑소아 1세가 시를 건립할 당시의 역사자료를 기초했다. 프로젝트가 완성되고 나니 일부 참여하지 않았던 캬반느 주인들이 뒤늦게라도 참여하고 싶다고 시에 문의가 빗발쳤다고 한다.

콘테이너 아치 인스타스타로 등극하다.

VINCENT GANIVET - © ERIK LEVILLY / VILLE DU HAVRE

 

이번 축제로 설치된 예술품 가장 주목받는 작품으로는 콘테이너 아치를 빼놓을 수 없다. 이 작품은 거대한 선박들과 도시의 중심인 시청을 연결하는 대로의 경계선 부두에 설치되었다. 프랑스 아티스트 뱅상 갸니베가 컨테이너 박스를 재활용하여 알록달록 색을 입혀 두 개의 아치를 교차하게끔 설치하였다. 다소 단순해 보이지만 남녀노소 모두에게 인기만점이다. 그 앞에서 기념샷을 찍으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니 조만간 아브르의 랜드마크로 등극할 것 같다.

그 외에도 흥미로운 작품들이 구석구석에 설치되어 도시 전체가 거대한 오픈 미술관을 방불케 하였다. 프랑스 예술가인 쥴리앙 베르티에는 〈러브러브〉라는 작품을 설치하였는데, 난파선 컨셉이다. 메세나로 부터 배를 기증 받아 이를 이등분하여 해저면에 설치하였다. 또한 전기공사의 대형 굴뚝을 빛으로 변화시킨 작품도 주목을 받았다. 팰리시 데스티엔 오르브가 〈금성과 화성〉이라는 제목으로 476개의 LED를 이용하여 도시의 야간 풍경을 반짝반짝 비춘다.

MUMA 미술관 © HWAHAENG LEE

 

또한, 이번 축제의 일환으로 아브르 시립근대미술관(MUMA)에서 동성커플 아티스트인 피에르와 쥘르의 전시가 한창이다. 아브태생인 쥘르의 영향인지 그들의 작품에는 선원복장을 입은 모델이 자주 등장한다. 더불어 무마미술관은 모네의 스승으로 알려진 으젠느 부댕의 콜랙션이 유명하다. 부댕의 가족들이 사후에 아뜰리에에 보관하고 있던 수많은 작품들을 이곳에 기증하였다.

글 | 이화행
아츠앤컬쳐 파리통신원, 파리 예술경영대 EAC 교수
소르본느대 미술사 졸업, EAC 예술경영 및 석사 졸업
inesleeart@gmail.com

 

출처 - 르 아브르(Le Havre), 500년 역사를 문화축제로 기념하다 < Festival < Event < 기사본문 - Arts & Culture (artsnculture.com)

 

 

 

 

 

 

 

 

 

 

6.  산업혁명에 힘입은 근대 건축…철·유리로 도심 마천루를 짓다

 

입력 :  2017-03-10 14:38:22
 
 
지난 5000여 년의 서양건축사는 시대순으로 고대서아시아 건축, 이집트 건축, 그리스 건축, 로마 건축, 초기 기독교 건축, 로마네스크 건축, 고딕 건축, 바로크 건축, 로코코 건축, 신고전주의 건축, 근대 건축, 현대 건축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중 근대 건축은 현대 건축으로의 변화에 가장 중요한 활동들이 있었던 시기다.

근대 건축을 주도한 선구자들은 18세기 산업혁명 이후의 공업 발달에 따른 공업화 재료인 철, 콘크리트, 유리를 사용하여 진보적인 건축을 시도했다. 또한 19세기 말부터 보급되기 시작한 전기의 영향과 산업조직의 대규모화는 도심지에 고층건물의 수요를 촉진시켰고, 도시 계획은 비능률적인 도시 기능의 문제를 지구계획과 교통망 재편성 등으로 해결하면서 발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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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강재료와 철근콘크리트 등장

근대 건축은 과학 발전의 영향으로 새로운 재료와 공법을 사용해서 건축의 활동 영역이 확대되고 건축적 표현의 범위가 넓어졌다. 그중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재료는 구조용 철강 재료와 철근콘크리트였다.

철재는 과거에도 건축에 사용되었으나, 강철로 된 보와 기둥은 근대공업의 산물로써 19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강철구조로 처음 지어진 건축물은 에펠(Eiffel)에 의하여 설계된 파리의 박람회용 대회장이 있으며, 이때 건축된 에펠탑(1889)은 그 시대의 기념적인 작품이다.

철근콘크리트는 19세기 말에 발명된 재료로 강철과 콘크리트를 이용하여 장스팬보(long span beam)를 만들어 대규모의 공간을 만들 수 있었다. 또한 새로 개발된 대형 판유리 제조법의 발달은 벽 전체를 유리창으로 하는 계획을 가능하게 하였고, 건물 내부에 자연광의 도입과 통풍을 최대화할 수 있게 하여 거주 환경이 개선됐다.

강철·콘크리트·유리 외에도 경금속재 등 여러 가지 새로운 재료들이 개발되면서 건축 활동에 다양한 시도들이 가능해졌고, 신기술과 새로운 전기·기계설비의 발전은 건축의 내용을 풍성하게 했다. 특히 마천루 건축을 가능하게 한 엘리베이터의 출현(1859)과 전기장비, 조명장치, 공기조화설비 등의 발전은 근대 건축 발전에 기여했다.

 


근대 건축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재료의 공장 생산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건축에 사용되는 모든 공장 제품들은 건축가가 요구하는 방향으로 협업을 통해 개발될 수 있었다. 근대 건축은 사회적 요구와 사상 및 가치관에 부응하는 동시에 건물 사용자를 위한 정서적인 환경을 만들고자 노력하였으며, 근대 건축 이전에 사용되던 목재·석재·벽돌 등의 재료를 적절히 활용하여, 보다 나아진 질감과 형태를 가진 건축물을 만들고자 했다.

에펠탑
■ 근대 건축의 성장과 아르 누보 운동

근대 건축의 초기 사상은 과학의 진보에 따른 그 시대의 사회적인 요구에 부응하며 19세기 후반부터 점진적으로 발전했다. 예술 분야와 접목되어 여러 가지의 실험과 사상을 통해 다양한 운동으로 등장하게 되었는데, 새로운 건축 사상이 구체적으로 형성된 것은 20세기 초 무렵이다.

1880년경 벨기에에서 반 드 벨데(Van de Velde)의 주도하에 구조와 형태가 건축의 참된 기반이라는 사상을 가진 새로운 경향이 조형예술가 사이에서 시작됐다. 이것이 아르 누보(Art Nouveau) 운동이다. 이 운동이 독일에 전파됐을 때는 유겐트 스틸(Jugent Still)이라 불렸다. 그들은 자연물의 유기적 형태로부터 새로운 영감을 얻어 그것을 양식화하여 적용하였다. 덩굴식물, 백합, 이국적인 꽃, 물결과 노니는 백조, 머릿결 휘날리는 여인 등 식물의 형태를 연상시키는 유려하고 우아한 선과, 파상곡선·당초무늬·화염무늬 같은 흐르는 듯한 생동감 있는 선형 표현으로 힘과 생명력이 충만한 선에 장식적 가치를 두었다. 또한 좌우대칭이나 직선적 구성을 피하면서 형태의 정교한 장식성을 특징으로, 유기적이고 움직임이 있는 모티브를 즐겨 사용하였으며, 과거의 양식과 차별화되는 완전히 새로운 생동적인 감각을 부여하려고 했다. 아르 누보 운동의 확산에 많은 영향을 미친 건축가의 작품은 매킨토시의 ‘글래스고 미술학교(1889)’가 있으며, 아르 누보의 영향을 받은 유명 작품으로는 안토니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1903~1926)’이 있다.

1897년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조셉 호프만이 시작한 분리파 운동은 과거의 양식에서 분리와 해방을 지향하는 건축 운동이다. 이 운동은 국제적인 운동으로 발전되어 각국의 건축가들이 서로의 실험 결과를 교환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호프만이 설계한 브뤼셀의 스토클레 저택(1911)은 시세션파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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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 타워
■ 독일 공예가 연맹과 프랑스의 근대 건축

 


1907년에 창설된 독일 공예가 연맹은 근대공업, 즉 기계생산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전개됐다. 이 운동은 새로운 건축 사상이 현실에 실제로 적용되는 기회를 가져왔다. 페터 베렌스가 1909년에 건축한 베를린의 터빈 공장은 근대 건축 최초의 작품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건물은 전형적인 근대공업의 문제에 대하여 합리적인 해결을 이룬 최초의 건축물로써 철과 유리 등의 근대적 재료를 합리적으로 활용하여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가 가지고 있는 성격을 잘 나타낸 기념비적인 건물이다.

프랑스에서는 근대 건축의 새로운 재료인 철근콘크리트가 발명되었을 뿐만 아니라, 20세기 초 프랑스의 건축가들은 철근콘크리트를 본격적으로 사용하여 발전시킴으로써 그 활용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되었다.

오귀스트 페레(August Perret)는 새로운 영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훌륭한 철근콘크리트 건물을 많이 설계하였으며, 그중 특히 유명한 것은 파리 ‘프랑클린가의 아파트(1903)’와 파리 근교의 랭스 ‘노트르담 대성당(1923)’이 있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철근콘크리트를 구조적으로나 디자인적으로 매우 합리적으로 사용한 기념비적 건물이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 1차 세계대전과 근대 건축 운동

미국에서의 근대 건축 운동은 고층 건축과 시카고 지역의 건축 활동을 통해서 나타났는데, 당시의 고층 건물은 구조의 규칙적이고 선율적인 특성을 외부로 솔직하게 표현하였으며, 이 중 주목할 만한 대표적인 건축은 설리반(L.H.Sullivan)이 설계한 카슨 피레 스코트(Carson Pirie Scott) 백화점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혼란 중에 현저하게 나타난 것은 독일의 표현파 운동이다. 자유스런 곡선, 부등변의 사각형과 삼각형 및 반원형 등 지금까지 건축에서 많이 사용되지 않던 형태가 주로 사용됨으로써 안정적이고 정적인 것보다는 불안정하고 동적인 느낌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포츠담에 있는 에릭 멘델존의 ‘아인슈타인 타워(1921)’가 있다.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잡지 <드 스틸>(1917년 발간)을 중심으로 한 구성파의 그룹을 드 스틸파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화가 도스부르크, 몬드리안, 건축가 토마스 리트벨트가 대표적이다.이 그룹에 속한 건축가들은 몬드리안이 화면을 검은 선으로 분할하고 몇 가지 색으로 구성한 것과 같이 과거의 예술양식과 장식을 없애 버린 순수하고 객관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였다. 토마스 리트벨트가 1924년 위트레흐트에 만든 슈뢰더 주택은 그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1919년 독일의 사회민주주의 정부는 이전에 아르 누보의 반 데 벨데가 바이마르에 만든 미술학교와 공예학교를 합병하여 바우하우스를 설립하고, 새로운 교육법을 발전시켰다. 초빙된 교수들은 예술의 추상화 운동을 지속적으로 바우하우스의 교육에 반영하였다.

 


바우하우스 운동은 실험적이고 진보적이었으며, 근대공업의 산물인 신재료의 과학적인 연구와 합리적인 사용, 생활 기능의 적극적인 파악 등을 근본 목표로 삼아 건축과 공예 교육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바우하우스의 활동도 정치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경제적인 이유로 1924년에 폐쇄되었다가, 1925년 데사우에 이전한 후 많은 활동을 하였다.

바우하우스 운동의 대표적인 작가는 발터 그로피우스다, 그는 넓은 유리 벽면인 커튼월을 고안·적용하여 건물의 투명성을 표현하였으며, 바우하우스 데사우는 이러한 건물의 투명성이 잘 표현된 작품이다.

1918년 프랑스의 순수파는 입체파의 수정에 의해서 나타났으며 화가 오장팡(Ozenfant)과 건축가 르 꼬르뷔지에가 중심이 되어 발전되었다. 르 꼬르뷔지에는 1914년에 철근콘크리트 기둥과 슬래브로 된 구조를 창안하여 벽체가 하중을 지탱하는 것에서 완전히 해방되도록 하는 도미노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 시스템에 의해 그의 작품의 특징이 발전하기 시작하였으며, 그의 초기 작품들에서는 이와 같은 자유로운 독창성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의 피해를 입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인해 호경기를 누리게 됨으로써 산업이 급격히 팽창하였다. 뉴욕에는 지가 폭등과 상업자본의 융성으로 마천루 건축물이 많이 건설되었으며, 높이 314m의 ‘크라이슬러 빌딩(1930)’과 당시 세계 최고 높이를 자랑하던 381m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1931)’은 이러한 고층화 건축의 절정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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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래스고 미술학교
■ 국제주의 건축활동과 C.I.A.M

국제주의 건축 활동의 구체적인 모습은 1928년 스위스에서 열린 근대 건축 국제회의(C.I.A.M.)의 결성으로 나타나게 되었으며, 각국의 건축가들은 매우 자유롭고 활발한 교류를 하였다. 당시 세계 각국에서는 국제적인 성격이 강한 기능주의 건축물이 많이 건축되었는데, 이를 통칭하여 국제건축양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근대 건축이 성장함에 따라 이와 같은 경향은 점차 지역적인 특성을 나타내는 방향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1933년 나치 정권의 출현으로 독일 근대 건축가들의 큰 업적은 한때 종지부를 찍게 되었고, 유명한 많은 근대 건축가들이 나치 지배하의 독일에서 다른 나라로 망명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초기 근대 건축 사상이 여러 나라에 전파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모더니즘 건축은 20세기 전반기 건축의 중심적인 사상으로 산업의 발달과 예술 사조의 영향을 받으며, 19세기 이전의 전통적인 건축 양식을 버리고, 시대적인 상황에 맞는 건축을 만들고자 했던 근대 건축 운동이었다. 모더니즘 건축은 당시의 매우 지배적인 운동이지만, 시대적인 배경 및 지역적 특성, 건축가의 성향 등에 따라 매우 다양한 운동 및 작품으로 나타났으며, 세부적인 운동, 디자인 학파, 건축 양식 등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급속히 확산된 모더니즘 건축은 국제적으로 많은 건축가와 건축 교육자들에게 받아들여져 20세기를 지배하는 건축 사조가 되었으나, 1960년대 이후에는 그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포스트모던 사조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후의 건축은 다양한 사조에 기반한 건축과 지역적 특성 및 건축가 개인의 성향이 강조되는 건축이 혼재되어 나타나는 현대 건축의 시기로 접어들게 된다.

[이태열 한미글로벌 부장]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78호 (2017년 03월) 기사입니다]

출처 - 산업혁명에 힘입은 근대 건축…철·유리로 도심 마천루를 짓다 - 매일경제 (m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