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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건축 갤러리 ■/아시아

32. 부관훼리 부산항에서 시모노세키까지 - 1 ( 2013.08.12.)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

 

 

부산광역시 동구 충장대로 206(초량동)에 위치한 국제여객터미널이다.

김해국제공항과 함께 부산광역시의 양대 해외여행 관문 중 하나다.

 

현재 터미널은 2015831일에 개장했고,

어지간한 공항 못지않게 대단히 널찍하고 깔끔한 시설을 자랑한다.

구 터미널은 중앙동4가에 있는데,

이전 이후에는 2016729일부터

제주도 행 배를 타는 부산항연안여객터미널로 활용되고 있다.

옛 연안여객터미널에는 부산항만공사가 들어가 있다.

 

중앙역과 부산 세관, 부산역 후문과 신국제여객터미널을 오가는

셔틀버스를 운영하고 있다.

도보로는 부산역 7번 출구 일명 부산역 후문과 보행데크로 연결되어 있어

캐리어를 끌고 편하게 철도역에서 여객터미널로 이동할 수 있다.

 

 

 

 

 

 

 

 

 

 

 

 

 

부관훼리

 

 

대한민국의 부산광역시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과

일본 시모노세키시 시모노세키항 국제터미널을 잇는 여객선.

한국 국적의 성희호(문서 최상단 사진의 선박)

일본 국적의 하마유호가 번갈아 운행한다.

 

그 연원이 오래 된 노선.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1905년의 부관연락선으로 시작한다.

이 노선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본토와 대륙을 잇는 중요한 노선이었다.

그러나 19456월 이후 정기 운항이 중단되었고,

1965년 한일기본조약 이후 국교가 재개되면서 이 노선의 부활이 논의되었다.

재일 한국인 사업가이자 야쿠자인 정건영의 투자로 19706월부터 운항이 재개되었다.

일본행 카 페리 노선 중 가장 최초로 개설되었고,

가장 오래 된 노선이기도 하다. 제주도 배편보다 가깝다

 

소요 시간은 약 7시간으로, 매일 1회 왕복 운항한다.

부산항에서 오후 8시에 출항하여, 다음날 오전 8시에 입국 수속을 밟는다.

항해 자체는 7~8시간이면 끝나서 새벽 3~4시경에 시모노세키 항에 도착하지만,

항만 직원들이 출근할 때까지 배 안에서 대기한다.

사실 도착하자마자 입국심사받고 나갈 수 있었다면 새벽시간대고

취침시간도 부족해 애매하기도 하다.

 

후쿠오카 항로의 뉴카멜리아호와 달리 배 2척이 번갈아 운행하기 때문에

일본에서 부산으로 돌아오는 선편도 밤에 출발해 아침에 도착하므로

숙박비도 아끼고 좀 더 일정을 합리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시모노세키시

 

 

야마구치현 서부에 위치한 항구도시.

인구는 약 25만 명으로 현청소재지인 야마구치시보다 인구가 더 많으며

현 내에서는 가장 많다.

부산광역시를 비롯 부울경 지역 사람들은 부관훼리 TV 지역광고 덕분에 익숙할 도시.

부산광역시가 일본의 도시들 중에서 최초로 자매결연을 맺은 곳이기도 하다

 

큐슈의 대도시 기타큐슈시와 웬만한 큰 강 정도 거리밖에 안 되는 좁은

칸몬 해협으로 나뉘어 맞은 편에서 마주보고 있으며, 칸몬교와 칸몬 터널로 연결되어 있다.

시모노세키 항구와 기타큐슈의 모지 항구를 묶어서 칸몬(関門)항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으며,

이 항구들은 일본 주요 무역항에 속한다.

 

칸몬 도로 터널은 보행자용 통로가 따로 있어서 도보 통행도 가능하다.

두 도시는 사실상 하나의 도시로 하나의 생활권으로 생각해도 무방할 정도로

가까운 쌍둥이 도시이다

시모노세키의 중심지 시모노세키역에서 전철 타고 기타큐슈의 중심지 코쿠라역까지

전철로 2, 기껏해야 14분이 걸린다.

이는 기타큐슈 시내 안에서 웬만큼 움직이는 것보다 더 시간적으로 가깝다.

배를 타야 했던 옛날에는 해협의 단절효과가 컸다지만

바다를 넘는 대교와 해저터널이 개통한 이후 상호통근도 많아지면서

두 도시의 생활권은 많이 합쳐진 편이다.

 

그러나 두 도시는 역사적으로는 전혀 다른 혼슈 주고쿠와 큐슈의 두 동네였고

과거 한국에서는 마관(馬関).

현재 下関이라 표기하는 시모노세키의 옛 명칭으로 부르기도 했었다

 

1905년부터 부관연락선이 부산과 시모노세키 항로를 연결했으며,

이는 일본의 조선 및 만주 등 대륙 침략의 수단으로서 활용되었다.

이 노선은 1945년 광복 이후 단절되었다가

국교 정상화 5년 뒤인 1970년 부관훼리로 다시 재개되어

현재까지 운항되고 있다.

 

 

 

 

 

 

 

 

 

 

 

 

 

 

 

 

 

 

 

 

 

 

 

 

 

 

 

아카마 신궁

 

 

아카마 신궁(일본어: 赤間神宮 아카마진구)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에 위치한 신사로, 일본의 안토쿠 천황을 모시는 신사이다.

에도 시대까지는 안토쿠 천황 어영당(일본어: 安徳天皇御影堂)이라는 별칭을 가졌던

사찰인 아미타사(일본어: 阿彌陀寺)였으나

일본제국시기 폐불훼석의 일환으로 인해 신궁으로 개조된다.

 

 

겐페이 전쟁의 단노우라 해전에서 다이라 가문과 함께 있던 어린 안토쿠 천황,

그의 어머니 도쿠시와 외할머니인 니이노아마(일본어: 二位尼-다이라 기요모리의 아내)가 있었는데,

다이라 가문의 패색이 짙어지자 니이노아마는 보검을 허리에 차고

삼종신기와 안토쿠 천황을 품에 안고 뛰어내릴 각오를 하며 외손자 안토쿠 천황을 껴앉았다.

그 때 안토쿠 천황에게 용궁으로 간다 얘기하고 함께 뛰어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왔다.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안토쿠 천황을 기리는 신사로 아카마 신궁이 건설되었다고 한다.

이 이후로 아카마 신궁은 조선통신사의 혼슈지역 첫 방문지이자 숙박지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사찰이었고, 메이지 유신시기에 신사로 개조된다.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경내 전각들이 전소되었으며, 1965년에 재건된다.

 

아카마 신궁은 다른 신궁과 다르게 유난히 붉은 색 안료를 많이 사용했는데

이는 류구의 양식이다.

이는 용궁의 일본식 발음이며, 일본 신화 속에 등장하는 해신의 궁전이다.

이는 안토쿠 천황이 죽어서 용궁으로 간다는 전설을 반영한 것이다.

 

현재 신궁 안에는

안토쿠 천황의 능인 아미다지능(일본어: 阿彌陀寺陵)이 존재한다.

 

 

 

 

 

 

 

 

 

 

 

 

 

 

 

 

 

 

 

건축물

 

 

신전(일본어: 神殿) - 아카마 신궁의 본전이다.

대안전(일본어: 大安殿) - 아카마 신궁의 배전이다.

축사전(일본어: 祝詞殿)

용궁전(일본어: 龍宮殿)

수천각(일본어: 水天閣)

보물전(일본어: 宝物殿) - 아카마 신궁의 보물전으로, 100엔의 입장료를 징수한다.

방일당(일본어: 芳一堂)

사무소(일본어: 事務所)

아미다지능(일본어: 阿彌陀寺陵) - 안토쿠 천황의 능이다.

칠성총(일본어: 七盛塚) - 헤이케의 공동묘지이다.

 

 

 

 

 

 

 

 

 

 

 

 

 

 

 

 

 

 

 

 

 

 

 

 

 

 

 

 

 

 

 

 

 

 

 

 

 

 

 

 

 

 

 

 

 

 

 

 

 

 

청일전쟁의 종전협정인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장소인 일청강화기념관

 

 

 

 

 

 

 

 

 

 

 

 

 

 

 

 

 

 

 

 

 

 

 

 

 

 

 

 

 

조선 통신사 상륙지

 

 

조선 통신사(朝鮮通信使)란 조선 후기에 일본으로 보낸 외교 사절단을 말한다

당시 어휘 '통신''국왕의 뜻을 전함'이라는 의미였다.

 

보통은 1607년 이후 조선이 에도 막부에 파견한 사절단만 가리키나

연구자에 따라서는 조선 전기에 일본측에 파견된 사절도 포함시키기도 하며,

실제로 실록을 찾아보면 태종 대부터 '통신사' 가 일본에 파견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임진왜란 이전 무로마치 막부 시절에는 딱히 규칙을 정해놓지 않고 몇 번 오갔고

오닌의 난 이후로 일본 전역이 전란에 빠지며 중앙 정부가 지방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우치 등 지방 다이묘가 따로 조선에 공물을 바치고 교류하기도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해 전국 시대를 끝내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직후에는

당연히 일본과 외교가 단절됐다.

임진왜란 전까지는 사절단이 일본 각지로 70번 가량 방문했다.

 

그러다 전쟁이 끝난 지 채 10년밖에 안 된 1607,

그동안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자신의 정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임진왜란과는 상관없다는 언급을 하며 먼저 국교 재개를 수차례 요구한 끝에

조선 조정이 이를 받아들여 국교를 재개한다.

이후 포로 교환 및 정보 수집 목적으로 3회에 걸쳐

사명당을 비롯한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라는 사절을 파견한다.

 

조선에선 원수였던 일본과 화해하는 게 달갑지는 않더라도

일본과 계속 사이 나쁘게 지내면 언젠가 다시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도 있었고,

또 후금(후일의 청나라)이 날이 갈수록 강성해지니 후방에 있는 일본과 좋게 지낼 겸

임진왜란의 전범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세력을 멸망시킨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어떤 사람인지는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도쿠가와 입장에선 새로 집권하긴 했지만

1615년 오사카 전투 이전까지는 도요토미 파벌을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한 상태라서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명분을 쌓을 필요가 있었던 데다가

그는 조선을 공격할 생각도 없었으므로 조선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게

이득이었다.

 

그 후 에도 막부 시기인 1811년까지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여

회답겸쇄환사가 3, 통신사가 9번 파견되었다.

 조선통신사는 한양을 출발해 육로로 동래까지 간 다음

배를 타고 오사카, 강을 거슬러 교토까지 가서 에도까지 이동했다.

(이상, 글출처 :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