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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건축 갤러리 ■/경 남 . 부 산

김해 봉황동유적 ( 패총과 봉황대, 2023.04.08.)

 

 

 

 

 

 

 

 

 

김해 봉황동 유적

金海 鳳凰洞 遺蹟

Archaeological Site in Bonghwang-dong, Gimhae

(대한민국의 사적 제2호)

 

 

1. 개요

 

경상남도 김해시 봉황동에 위치한 1~4세기경 청동기시대금관가야 유적이다.

1963년 사적 제2호로 지정되었다.

 

2. 상세

 

원래 사적 제2호는 김해 회현리 패총이었다바로 옆에 봉황대 유적(과거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7)이 있었는데,

이 두 유적이 서로 관련이 크다는 지적이 있어왔고 2003년에 둘을 합쳐서 사적 제2호 김해 봉황동 유적으로 재지정했다패총(조개무덤)과 봉황대는 김해 봉황동 유적의 일부분이 되었다.

 

2.1. 회현리 패총

패총즉 초기 가야 사람들이 조개를 까 먹고 조개껍데기 등 각종 쓰레기를 버린 구덩이로 수많은 중요한 유물이 발굴되어 주목받았다수많은 김해식 토기(주로 취사용), 각종 철기잡아먹은 동물뼈일본계 수입품 등중국 신나라 때 동전이 나와 당시 시대의 국제교역 상황을 알 수 있고우리나라 최초로 불에 탄 쌀이 출토되어 쌀 농사 기원 연구에도 도움이 됐다.

패총 전시관이 있다.

 

또한 1907년 대한제국 시기우리나라 최초로 근대적 고고학 조사를 실시한 곳이기도 하다.

 

2.2. 봉황대

본래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7호 였는데사적 제2호로 통합되었다.

금관가야권 최대의 생활 유적지가야시대 주거지가 발굴됐고 2005년 망루가옥 등을 복원해 가야시대 건축물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했다.

 

옛날부터 가라대망해대여의현독현회현 등으로 불려왔다조선 고종 김해부사 정현석(鄭顯奭)이 봉황대란 이름을 지은 뒤로 봉황대로 불린다.

 

경주시의 신라왕릉급 거대무덤 봉황대와는 이름만 같고 관련은 없다

 

2.2.1. 황세와 여의 이야기

 

봉황대에는 황세와 출여의의 못 이룬 사랑 이야기가 전한다.

가락국 제 9대 겸지왕 때 남대정동에 사는 출정승과 북대사동(대성동)에 사는 황정승은 자식이 태어나면 혼인을 시키기로 하였다황정승은 아들 황세를 낳고 출정승은 딸 여의를 낳았다그러나 황정승의 집안이 어려워 지자 출정승은 마음이

변하여서 자신은 아들을 낳았다고 속였다여의는 남자 옷을 입고 서당에 다녔으나 티가 났다황세는 이를 수상히 여기고 여의에게 황세바위에 올라가 오줌 멀리 누기 대결을 하자고 하였다여의는 바위 뒤로 돌아다 마침 그곳에 있던 삼대로

오줌을 누어 정체가 탄로나는 것을 피했다.

 

여름 어느 날 여의는 거북내에서 목욕을 하다 상류쪽에서 황세와 마주치게 되었다더 이상 여의는 숨길 수 없어 편지를

물에 거슬러 띄워 황세에게 이 사실을 고하였고 이후 둘은 연인이 되었다출정승도 결국 결혼을 허락하였다얼마 후

신라군이 가락군을 침범해 오자 겸지왕은 군사를 모집했는데황세는 자진해서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왕은 황세에게 '하늘장수'라는 칭호를 주었고 자신의 딸인 유민공주와 결혼을 시켜 부마로 삼고자 하였다.

 

이미 약혼한 사이였던 황세는 결혼을 할 수 없다고 하지만 왕은 출정승을 불러 파혼하라고 요구하였고결국 황세는 유민 공주와 결혼하게 되었다여의의 부모는 딸에게 다른 곳으로 시집가기를 권유하였으나 여의가 거부하였다하지만 어머니마저 숨을 거두자 여의는 더욱 슬퍼하다가 결국 죽고 말았다황세는 이 소식을 듣고 여의를 잊지 못하여 슬퍼하고 괴로워하다가 마찬가지로 유명을 달리하였다.

 

사람들은 둘 연인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여의와 황세가 놀던 개라암에 작은 바위를 얹었는데 서남쪽의 것은 황세바위,

동남쪽의 것은 여의바위라 불다한편 홀로 남은 유민공주는 황세와 여의의 영혼을 기리며 평생을 살겠다고 하여 경운도사와 함께 임호산에 들어갔다고 한다.

위의 이유로 임호산을 유민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975년 여의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여의각을 설치하였다봉황동

황세바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3. 사적 제2

 

김해 봉황동 유적 (金海 鳳凰洞 遺蹟)

 

패총은 조개껍질과 생활 쓰레기가 함께 버려져 쌓여 있는 곳으로, ‘조개더미라고도 하며 당시 생활모습을 알 수 있는

장소이다.

봉황대 언덕 근처에 서로 시기가 다른 회현리 조개더미와 다양한 무덤유적이 있다.

 

회현리 조개더미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토기·뿔도구석기가락바퀴(방추차), 불탄쌀(탄화미), 중국 화폐인 화천,

동물뼈 들이 나왔다토기는 적갈색이나 회청색을 띠며사슴뿔이나 뼈를 가공해 만든 칼자루가 많다불탄쌀은 고대의

쌀과 농경 연구에 큰 도움을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화천은 중국 신()나라의 왕망이 기원전 14년에 만든 화폐로 유적이 형성된 연대를 알게 하는 중요한 자료이며 중국과의 왕래도 짐작하게 한다.

 

조개더미의 동쪽에서 고인돌항아리에 뼈를 넣었던 독무덤(옹관묘), 집터가 발견되었다무덤들은 청동기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김해 봉황동 유적은 우리나라 남부지방의 14세기경 생활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유적이다.

(글출처 : 나무위키)

 

 

 

 

 

 

 

 

 

 

 

 

봉황동유적 패총전시관

 

 

 

 

 

 

 

 

 

 

 

 

 

 

 

 

 

 

 

 

 

 

 

 

 

 

 

 

 

 

 

 

 

 

 

 

 

 

 

 

 

 

 

 

 

 

 

 

 

 

 

 

 

 

 

 

 

 

 

 

 

 

 

 

 

 

 

 

 

 

 

봉황대 여의각

 

 

 

 

황세와 여의 낭자

 

김해 시내 봉황대에 얽힌 가야시대의 비극적인 결혼 전설

 

봉황대(鳳凰臺)는 김해시 중심가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구릉으로, 동남쪽으로는 회현리 패총이 있는 구릉과 연결되어

있다. 옛날부터 가라대(伽羅臺), 망해대(望海臺), 여의현(如意峴), 독현(獨峴), 회현(會峴) 등으로 불리어 왔으며,

봉황대라는 이름은 조선 고종 초의 부사 정현석(鄭顯奭)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진다

봉황대는 인근에 패총과 주거지 등 가락국 당시의 다양한 유적이 발견된 곳이다

 

1975년에는 출여의낭자(出如意娘子)의 정절을 기리기 위한 여의각(如意閣)이 세워졌는데 매년 여의제(如意祭)

열리고 있ㄷ는데,  전하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가락국 제 9대 겸지왕(肅王) 때 남대정동(南大政洞)에 사는 출정승과

북대사동(北大寺洞:현 대성동)에 사는 황정승은 자식이 태어나면 혼인을 시키기로 약속했다. 이후에 황정승은 아들

()를 낳고 출정승은 딸 여의(如意)를 낳게 되자 출정승은 마음이 변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속였다

 

자라면서 여의는 남자 옷을 입고 서당에 다녔는데 이것을 수상하게 여긴 황세는 개라암(황세바위)에 올라 '오줌 멀리가기 시합을 하자고 제의하였다. 그러자 여의는 바위 뒤로 돌아가 마침 그곳에 있는 삼대로 오줌을 누어서 낭패를 면하였다.

그렇지만 결국 어느 여름 거북내(龜川)에서 멱을 감게되자 여의는 더 이상 여자란 사실을 숨길 수가 없게 되어 편지를

물에 거슬러 띄어 보내어 황세에게 사실을 고백하게 되었다. 출정승도 결국 황세가 장차 훌륭한 인물이 될 것으로 믿고

혼약을 맺어주었다.

 

얼마 후 황세는 신라군이 침범해오게 되자 출정하여 큰 공을 세우고 개선하게 되었. 이에 왕은 황세에게 하늘장수라는

장군 칭호를 제수하고 외동딸인 유민(流民)공주와 혼례를 시켜 부마로 삼았다.

 

여의의 부모는 파혼 당한 여의낭자에게 다른 곳으로 시집가기를 권유하지만 낭자는 끝내 혼자 살다가 24세의 꽃다운

나이로 죽고 말았다고 한다.

공주와 혼인한 황세 또한 여의낭자를 잊지 못하여 마음의 병으로 그 해에 역시 죽고 말았다. 그러자 성안 사람들은 둘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그들이 매일같이 놀던 개라암에 작은 바위를 얹고 서남쪽의 것은 황세돌’, 동남쪽의 것을

여의돌이라 불렀다고 한다.

 

한편 유민공주도 봉황대 서쪽의 임호산(林虎山)으로 들어가 수도에 정진하였다고 전하는데 그래서 임호산을 유민산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전설과 관련된 곳으로는 여의낭자가 죽어서 혼이 들어갔다고 전해지는 하늘문 이라고 불리는 돌문이 있고, 황세장군과 여의낭자가 약혼한 후 처음으로 놀았다는 평평한 바위인 여의좌(如意座), 그리고 망견대(望見臺), 여의목(如意木),

황세목(黃洗木), 소변터 등이 남아 있다.

 

 

 

 

 

 

 

 

 

 

 

 

황세바위

 

 

 

 

 

 

 

 

 

 

 

 

 

 

 

 

 

고상가옥 주거


여기에 복원된 고상가옥과 주거 등은 봉황동유적에서 발굴조사된 가야시대 건물지 등을 참고로 하여 2002년 봉황동유적정비사업의 일환으로 복원한 것이다. 가야시대의 일반적인 주거형태는 반지하식으로 땅을 파고 그 위에 벽과 지붕을

올리는 형태인데, 여기에 복원된 수혈주거지는 봉황대 진입 소방도로내 유적 제46호 주거지를 참조하여 추정복원한

것이다.

고상가옥은 가야시대 보편적인 주거형태인 수혈주거와 달리 바닥면이 지면보다 높게 만든 건축물로서 주로 곡식 등을

저장하는 창고나 제의 등과 관련된 특수 용도의 건물이 많다. 즉, 고상가옥은 난방시설이 용이하지 않아 일반주거용 건물로는 부적합하지만 지면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만들어져 짐승과 습기, 침수 등으로부터 방해, 방재의 효과가 있기 때문에

창고 등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안내문, 김해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