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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건축 갤러리 ■/경 북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 영주 소수서원 (2023. 02.)

 

 

 

 

 

 

 

 

 

 

영주 소수서원

(榮州 紹修書院)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임금이 이름을 지어 내린 사액서원이자 사학(私學)기관이다.

조선 중종 37년(1542)에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안향(安珦)을 제사하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가, 중종 38년(1543)에 유생들을 교육하면서 백운동서원이라 하였다. 명종 5년(1550)에는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의해 ‘소수서원’이라 사액을 받고 나라의 공인과 지원을 받게 되었다. 중종 39년(1544)에 안축(安軸)안보(安輔)를 제사지냈고, 인조 11년(1633)에는 주세붕을 더하여 제사지냈다.

서원의 건물은 비교적 자유롭게 배치되었는데 일반적인 서원의 배치가 완성되기 이전인 초기의 서원이기 때문인 듯하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강당인 명륜당이 있고 학생들이 머물며 공부하는 일신재와 직방재가 연속으로 있다. 서원의 일반 배치가 강당 좌우에 대칭으로 동·서재를 두는 것인데 비해, 소수서원은 현판의 이름으로서 구분하였다.

사당은 명륜당의 서북쪽에 따로 쌓은 담장 안에 있다. 서원이 있던 자리에는 원래 통일신라시대의 절인 숙수사가 있었는데, 그 유적으로 당간지주와 초석 등이 남아있다.

소수서원은 조선시대 후기에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지금도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 명칭변경: 소수서원 → 영주 소수서원(2011.07.28)

<세계유산등재: 한국의 서원(2019. 7. 6.)>

Ο 유산지역: 소수서원(영주), 남계서원(함양), 옥산서원(경주), 도산서원(안동), 필암서원(장성), 도동서원(달성), 병산서원(안동), 무성서원(정읍), 돈암서원(논산)

Ο 성리학과 관련된 한국의 문화적 전통의 탁월한 증거로 그 교육과 사회적 관습은 많은 부분 오늘날까지 지속됨. 서원은 중국에서 들어온 성리학이 한국의 여건에 맞게 변형되고 있고 그 결과 그 기능과 배치, 건축적인 면에서 변화를 겪고 토착화되는 역사적 과정에 대한 특출한 증거임.

※세계유산적 가치(탁월한 보편적기준/OUV) 보유(기준ⅲ)

 

 

 

 

 

 

 

 

 

 

 

 

 

 

 

 

 

 

 

 

 

 

 

 

 

 

 

 

 

 

취한대(翠寒臺)

 

정자 앞으로 맑고 푸르게 흘러내리는 죽계수(竹溪水)를 보면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이곳이

학문을 닦기에는 더없이 좋은 환경임을 절감하게 된다. 죽계수는 고려 때 안축이 죽계별곡을 창작한 곳이며

퇴계 선생이 죽계구곡을 명명한 곳이기도 하다

 

퇴계 선생이 세웠다고 하는 취한대(翠寒臺)는 소수서원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 위쪽 암벽에는

퇴계 선생의 글씨로 알려진 '백운동(白雲洞)'이라는 글자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그 글씨 아래에는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의 글씨로 새겨진 경()자가 있다.

이 바위를 백운동 경자바위라고 한다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서원은 조선 사회에 성리학*이 정착하면서 사림** 세력이 지방에 설립한 사립 고등교육기관이다.

서원은 성리학을 연구하며 인재를 교육하는 강당이 있는 강학 공간, 존경하는 스승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사당이 있는 제향 공간, 그리고 유생들이 시를 짓고 토론도 벌이며 휴식하고 교류하는 유식 공간***으로 구성되었다.

주변의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며 인격을 갈고닦는 인성교육에 중심을 두었다.

 

조선 시대 서원 중에서 소수서원, 남계서원, 옥산서원, 도산서원, 필암서원, 도동서원, 병산서원, 무성서원,

돈암서원의 9개 서원이 2019년 7월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한국의 서원’이란 이름으로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되었다. 이들은 한국 서원의 총체적인 특성을 보여 준다.

‘한국의 서원’은 “문화적 전통, 또는 현존하거나 소멸된 문명과 관계되면서 독보적이거나 적어도 특출한

증거를 지니고 있는 것”이라는 세계유산 등재기준 (ⅲ)을 인정받아 세계유산이 되었다.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중반에 걸쳐 건립된 이들 서원은 조선 시대 성리학이 교육과 사회 활동에 널리 퍼져 있었다는

명확한 증거이다. 또 이 서원들은 전국 각지의 지식인들이 제향을 올리고 강학을 하여 성리학 교육 체계를 만들고,

그것에 꼭 맞는 건물을 지어, 성리학 가치가 담긴 독특한 역사 전통을 만들어 가는 공간이었다.

 

‘한국의 서원’을 이루는 9개 서원

- 소수서원: 1543년에 최초로 건립. 건물, 공간의 기본 요소와 제향과 강학 관련 규정을 처음으로 수립하여

                  서원의 기준이 되었다.

- 남계서원: 1552년에 건립. 강학 공간의 뒤에 제향 공간을 배치하고 유식 공간까지 완벽하게 갖춘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 옥산서원: 1572년에 건립. 서원이 교육과 출판·장서의 중심 기구로 기능하게 된 것을 보여주며,

                  정문에 누마루 건축물을 처음으로 세운 서원이다.

- 도산서원: 1574년에 건립. 사회와 정치에 영향을 많이 미친 서원으로, 서원이 학문과 학파의 중심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 필암서원: 1590년에 건립. 호남지역의 평탄한 지형에 맞추어 강당과 기숙사가 사당을 바라보도록 건물을

                   배치하여 예의를 표했다.

- 도동서원: 1605년에 건립. 자연과 조화를 이룬 서원의 특징을 대표한다. 비탈진 지형을 이용해서 낙동강을 바라보게

                  건물을 세운 건축 배치가 탁월하다.

- 병산서원: 1613년에 건립. 만대루는 서원 누마루 건축 형태의 탁월한 사례이며, 서원의 역할이 교육기관에서

                  여론 수렴지로 확대되었음을 보여준다.

- 무성서원: 1615년에 건립. 지역의 학문 부흥과 성리학 전파에 힘쓴 서원이다. 향약의 바탕이 되었으며 20세기 초

                  항일 의병의 근거지가 되었다.

- 돈암서원: 1634년에 건립. 성리학의 실천 이론인 예학 논의의 산실이며, 예학을 건축으로 표현한 강학당인

                  응도당이 탁월하다.

 

*성리학(性理學): 중국 송나라 때에 주희가 집대성한 유학의 한 파

**사림(士林): 조선 시대 성리학적 가치를 중시하던 지식인을 일컫는 말

***유식 공간(遊息 空間): 자연 속에서 수양하고 휴식하는 일을 성리학을 배우는 과정의 하나로 보고,

자연과 더불어 수양할 수 있도록 서원 내외부에 조성한 공간

 

(이상 글 출처 : 문화재청)

 

 

 

 

 

 

 

 

 

 

 

 

 

 

 

 

경렴정(景濂亭)

 

 

소수서원 정문 바깥 동쪽 절벽 위에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건립한 경렴정(景濂亭)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누각으로, 바깥 전면에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해서체 편액이 있고, 내부에 퇴계의 제자인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의 초서체 편액이 걸려 있다.

풍기읍에 건립된 군수주공선정비(郡守周公善政碑)천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학행이 순수하였다.

노인을 공경하고 착한 일을 존대하며 가르침을 앞세우고 형벌을 뒤로하고 용서를 미루어 은혜를 베풀었다.

부로(父老)들이 모두 말하기를 우리나라 개국 이래로 군수로 온 사람이 이런 이가 없었다라며 신재의 선정을

칭송하고 있다

 

경렴정(景濂亭)은 성리학의 비조 주돈이를 경모한다는 뜻이며, 현판 글씨는 주세붕 선생이 직접 썼다고 한다

 

 

 

 

 

 

 

 

 

 

 

 

 

 

 

 

 

 

 

 

 

 

 

 

영주 소수서원

(榮州 紹修書院)

(Sosuseowon Confucian Academy, Yeongju)

 

 

종목 사적 제55

(1963121일 지정)

면적 18,657m2

시대 조선시대

소재지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151

제향 인물 안향

건립 연대 조선 중종 37(1542)

다른 이름 백운동서원

 

 

영주 소수서원(榮州 紹修書院)1543, 중종 38년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당시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이 이 지역출신으로 성리학을 한반도에 처음 도입한 고려때의 유학자 안향(安珦) 선생을

배향(配享)하는 사당과 후진양성을 위한 사립학교를 함께 건립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처음에는 백운동 서원이라 불렸으나 1550년 퇴계 이황의 요청으로 명종으로부터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현판을

하사받았다.

 

1868,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으나 우리나라 최초로 세워진 서원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폐쇄되지 않고

현재까지 남아있게 되었다. 1963121일 사적 제55호에 지정되고, 2019710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소재지는 경북 영주시 순흥면 소밸로 2740 (내죽리 152-8)이다.

 

[ 개요 ]

 

1542(중종 37) 풍기군수(豊基郡守) 주세붕이 풍기 지방의 교화를 위해 이곳 출신으로 성리학을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한 유학자 안향(安珦)의 신주(神主)를 모시기 위해 통일신라 시대에 세워졌었던 숙수사(宿水寺) 터에

사우(祠宇)를 세웠다.

이듬해 1543(중종 38) 사우(祠宇) 앞에 향교 건물을 옮겨다 재실(齋室)을 마련하고 선비들의 배움터로 삼음으로써,

서원의 대체적인 골격이 이루어졌다.

 

서원의 시설을 정비한 주세붕은 주자(朱子)백록동 학규(白鹿洞 學規)를 채용해서 유생들에게 독서와

강학(講學)의 편의를 주었으며, 한양의 종갓집에서 안향의 영정을 옮겨와 봉안하고서 처음으로 이름을

'백운동 서당'(白雲洞 書堂)이라고 하였다. 이후 1545(인종 원년) 에 안축(安軸)과 안보(安補)의 영정도 함께

배향하면서 백운동 서원(白雲洞 書院)이라 부르게 되었다.

 

영풍군은 본디 영주, 풍기, 순흥 세 고을이 비슷한 규모로 솔밭처럼 나뉘어 오랜 역사를 이루어온 곳이다.

소수서원이 위치한 자리는 원래 '숙수사'라는 이름의 사찰터로, 서원 입구에는 현재까지 4m 높이의 당간지주가 남아있다.

 

주세붕은 임백령이나 이언적 등의 도움을 받아 제향과 교육을 위한 재정 기반을 마련하고, 서책을 사들여 서원 문고를

조성하였으며, 주세붕 자신도 종종 서원에 들러 고을 선비들과 함께 성리학 강론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주세붕이 처음 서원의 터를 닦은 뒤, 1546(명종 원년) 안향의 후손으로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안현(安玹)

경상도의 각 고을에 협조 요청하여, 서원에서 일할 노비와 제수에 필요한 식량, 어염(魚鹽) 등을 확보하고, 서원의 관리와 운영을 위한 운영 규정을 정하여 서원의 원장 임명 문제와 원생의 정원수, 제향 절차 등을 상세하게 규정하였다.

이렇게 하여 백운동 서원이 보유한 전답 30(9만 평)에 어장과 염분 및 보미(寶米)도 운영하게 되면서 서원은 토대를

굳히게 되었다.

 

1549(명종 4) 퇴계 이황이 풍기 군수로 부임해 와서 서원의 격을 높이고자 했다. 그래서 송() 시대의 예를 언급하며

국가에서 서원에 대한 합법적인 인정과 정책적인 지원을 해줄 것을 당시 경상도 관찰사 심통원에게 요청하였다.

1550(명종 5) 어전회의에서 좌의정 심연원(심통원의 친형)의 주청으로 마침내 당시의 국왕이었던 명종은 친필로

소수 서원(紹修書院)이라 사액(賜額)을 내렸다. 아울러 사서오경성리대전등의 서적, 노비도 하사했다.

'소수(紹修)'"이미 무너져버린 교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旣廢之學 紹而修之)"는 데서 온 말이었다.

 

이것은 소위 사액서원의 시초였으며, 이로써 나라가 인정하는 사학(私學)이 되었다.

사액된 뒤 입학 정원도 10명에서 30명으로 늘어났으며, 또한 서원의 원생들이 배움에 충실하도록 이황은 서원에서의

학업 규칙도 정하여, 배움의 장으로서의 서원의 위치를 공고히 하는데 힘썼다. 당시 입학 자격은 초시에 합격했거나

학문에 정진하는 자들이었고, 학문에 정진하지 않고 과거 시험에만 한눈을 팔거나 미풍양속을 어기는 경우 곧바로

퇴원당했다. 소수서원에서 공부한 유생은 4천 명에 달했으며, 그 중에는 임진왜란 때에 경상우병사로

진주성에서 전사한 김성일, 선조 때의 좌의정이었던 정탁도 있었다.

 

1544(중종 39)에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추가 배향하였다. 1633(인조 11)에 주세붕을 추가 배향하였다.

1871(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毁撤)되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가 되었다.

 

 

 

 

 

 

사주문

 

 

 

 

 

 

강학당

 

 

 

 

 

 

 

 

[ 주요 시설 ]

 

 

사주문(정문)

 

입구에 경렴정(景濂亭)이라는 정자가 있고, 죽계 건너편 물가에는 취한대가 위치해있다.

 

강학당

 

정면 4칸에 측면 3칸으로 장대석 바른층쌓기의 높은 기단 위에 주초를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다. 

평면구성은 마루방 3칸과 온돌방 1칸으로 사면에 폭이 좁은 쪽마루를 돌렸다. 기둥 윗몸은 창방으로 결구, 

기둥 위에 주두를 놓고 쇠혀를 하나 내어 이들을 서로 결구한 굴도리 초익공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주두위에 놓인 대들보의 보뺄목은 일부에선 사면으로 끊겼으나 방을 둔 곳에서는 초각하여 둥글게 처리했다. 

상부가구는 5량가이고 앞뒷면에 놓인 평주들의 간살은 통칸으로, 20여 척 이상이 되나 대들보를 전후 평주 위에 놓고

잘 치목한 대량 위에 주두와 초각 보아지를 끼운 동자주를 두어 종량과 중도리를 받쳤다. 

종도리는 소로를 끼운 파련대공 위에 올려져 있다. 백운동(白雲洞)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서재

 

서원의 기숙사 구실을 하는 곳이다. ·서재가 한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면 6, 측면 1칸 반의 납도리

소로수장집이다. 평면구성은 가운데 2칸 마루방을 중심으로 양측에 온돌방 2칸을 두고, 온돌방 앞에는 퇴를 깔아

헌함을 세웠다.

 

문성공묘

 

학구재·지락재

 

 

유네스코 세계유산

 

문화재청은 2018 1월 이곳 영주 소수서원을 비롯한 한국의 대표서원 9곳을 한국의 서원으로 지정하여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 신청하여, 2019 7 10일 제43차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글 출처 : 위키백과)

 

 

 

 

 

 

 

학구재·지락재

 

 

 

 

 

 

 

 

 

 

 

동·서재

 

 

 

 

 

영정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