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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이야기 ■/전통건축 이야기

영양 서석지 - 바위처럼 살리라 (2023.01.01.)

 

 

 

 

 

 

 

 

 

   영양 서석지

- 바위처럼 살리라 -

 

 

 ‘전북에 무진장이 있다면 경북에는 BYC가 있다’라는 말이 전해 온다. 전북 지역의 산간벽지 오지 삼총사가 무주, 진안, 장수라고 한다면 경북에서는 봉화, 영양, 청송이 그기에 버금간다는 말이다. 그러나 옛날에야 교통이 불편하고 낙후된 지역의 대명사였지만, 지금은 자연이 살아 숨쉬는 청정지역, 웰빙 지역의 대명사로 미래를 위한 희망의 땅으로 날로 그 가치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고장들이다.

 

 내륙 깊숙한 경북 동북부 일출산 자락에 위치한 영양군은 고추와 반딧불이로 유명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청정지역이자, 수많은 인재와 문인을 배출한 문학과 예술의 고장이기도 하다.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주실마을, 현대 서정시인 오일도의 감천마을, 소설가 이문열의 두들마을 등 걸출한 문인들의 생가와 역사 깊은 전통마을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아울러, 일월산에서 발원해 영양 읍내를 가로질러 흘러내린 반변천이 청기천과 합류하는 남이포에는, 역모를 꾀하여 반란을 일으킨 아룡과 자룡 형제를 토벌한 남이 장군이 이 부근의 기운이 높아 도적의 무리가 다시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큰 칼로 산맥을 잘라 물길을 냈다고 하는 남이포의 탄생 설화와 함께 자금병이라고 불리는 깎아지른 기암절벽과 촛대처럼 솟아오른 선바위가 비경을 이루고 있다.

 남이포에서 아래쪽으로 반변천을 따라 내려가면 영양군의 유일한 국보인 통일신라시대의 유물, 봉감모전석탑이 있고, 남이포 위쪽에 자리 잡은 연당마을에는 담양의 소쇄원, 보길도의 세연정과 함께 우리나라의 3대 민간정원으로 꼽히는 영양 서석지瑞石池가 보석처럼 숨겨져 있다.

 

 

 

 

 

 

 

 

 

 

 

 

 

 

 

 

서석지는 조선 광해군 때 석문石門 정영방 선생이 만든 조선시대 민가의 대표적인 연못이다. 석문 선생의 자字는 경보慶輔이며 동래 정씨이다. 예천군 용궁에서 출생하여 우복 정경세 선생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퇴계 이황, 서애 유성룡, 우복 정경세로 이어지는 퇴계학파 삼전三傳의 제자로 알려져 있다.  성균관 진사로 벼슬을 시작하였으나 광해군 이후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낙향하여 자양산 남쪽 기슭인 이곳 입암면 연당마을에 터를 잡고 살게 되었는데, 선생이 일생에 세 번이나 벼슬에 나아갈 기회가 더 있었으나 그때마다 사양하고 이곳 자신의 이상향, 서석지에서 후학들을 가리키며 세월을 보냈다 한다.

 저서로는 암서만록巖棲漫錄 1권과 석문유고 두 권이 초고로 있던 것을 정리하여  현재 '석문선생문집'이라는 이름으로 4권이 전한다. 석문 선생은 특히 시에 일가를 이루어, 석계 이시명, 이환 등과 교류한 시를 비롯하여 470여수가 전하고 있다. 그리고  서재 겸 강학처로 건립한 정자인 경정을 노래한  경정잡영敬亭雜詠이 전해져 오고 있다.

 

 서석지瑞石池는 ‘상서로운 돌들의 연못’이라는 의미를 가진 조그마한 연못이다. 담양의 소쇄원, 보길도의 세연정과는 규모면에서 상대가 되지 않고 이름만 듣고 처음 찾아 온 사람은 실망감마저 느낄 수 있는 그저 평범한 연못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작고 평범한 연못을 석문 선생은 유교적 이상과 생활철학으로 가득 채워서 유교적 이상향으로 펼쳐 놓았다.

 풍수적 이유로 앞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판 연못에서 우연히 나온 평범한 돌들에게서 기발한 영감을 얻고, 각자 돌마다 이름을 붙이고 유교의 철학과 이상을 접목하여 무심한 돌에게 의미와 생명을 불어 넣어 작은 우주를 완성하였다. 이 조그맣고 평범해 보이는 서석지가 조선시대의 3대 민간정원으로 대접받는 이유중 하나이다.

 

 

 

 

 

 

 

 

 

 

 

 

 

 

 

 

 

 

 

 서석지의 전체적인 공간구성은

공경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강학처인 정자, 경정敬亭과

소나무松, 대나무竹, 매화梅, 국화菊 등 선비의 네 가지 벗을 심어놓은 사우단四友壇,

한가지 뜻을 받드는 서재라는 뜻의 주일재主一齋,

경정 뒷담 너머에 있는 자양재(紫陽齋)와 아래채, 서고인 장판각(藏板閣),

연못 앞의 400년  된 은행나무

그리고 약 90여개의 상서로운 돌로 채워진 연당蓮塘으로 이루어져 있다.

 

 담장과 90도로 꺾어진 대문을 들어서면 경정敬亭을 앞에 두고 오른쪽으로 장방형의 요(凹)자형 연못이 나온다. 연못의 규모는 가로 13.4M, 세로 11.2M 정도의 크기이고, 경정 주변은 통로를 제외하고는 연못이 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어, 연못이 마당이고 마당이 곧 연못이다.

 연못은 자연석으로 쌓았고 연못 북쪽에 돌출된 네모난 단을 만들어 사우단四友壇이라 하였으며, 연못의 동북쪽에 물이 들어오는 곳을 ‘맑음에 대해 공경을 표시하는 도랑’이라는 의미에서 ‘읍청거(揖淸渠)’라고 불렀고. 물이 빠져나가는 곳을 ‘더러움을 뱉어 내는 도랑’이라는 의미에서 ‘토예거(吐穢渠)’라고 불렀다.

 

 

 

 

 

 

 

 

 

 

 

 

 서석지에는 무려 90여개의 돌이 있다. 물 위에 떠 있는 게 60여개, 물에 잠긴 돌이 30여개나 되는데, 이 중에서 이름과 시가 붙어 있는 돌이 19개가 있다. 연못을 만들기 위해서 바닥을 파보니 나온 평범하고 무심한 돌들인데 제각기 철학적이고 심오한 이름을 붙여놓았다.

 사우단 축대 왼쪽 아래의 관란석은 ‘배우는 자는 끊임없이 노력해야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고, 사우단 오른쪽의 상경석은 ‘선비는 마땅히 내면을 충실히 하고 재화나 명예를 탐내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제갈공명의 고사를 담고 있는 와룡암도 있고, 연못 입수구의 분수석은 ‘물이 여러 갈래로 흐르지만 그 근원은 하나’라는 뜻으로 인간의 근본이 인仁이라는 것을 상징한다.

 연못 안의 여러 돌중에서도 중심축선상에 위치한, 옥황상제가 사는 세계를 뜻하는 옥계척과 연못에 떨어진 별인 낙성석, 구름 속에 솟은 다리를 상징하는 통진교, 신선이 노니는 바위인 선유석은, 서석지를 신선의 세계로 안내하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한다.

 

 

 

 

 

 

 

 

 

 

 

 

 

 

 

우리가 흔히 거북바위, 용바위, 귀신바위 등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형상이 특정 사물과 닮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서석지의 돌들은 그 형태와는 크게 상관없이 석문 선생의 유교적 생활철학이나 이상, 혹은 도교적 염원 등을 바위 하나하나에 접목시켜서 선생이 추구하는 세상을 작은 연못 속에 만들어 놓았다.

 한편,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정원을 만드는 일이 시를 짓는 일과 같다고 생각했다. 보기 위한 그림 같은 풍경이 있는 정원보다는, 운치가 감도는 시를 노래하기 위한 장소로서의 정원을 더 추구하였다. 그래서 그냥 조경造景이 아닌 시적 조경詩的 造景을 추구하여 이를 시경詩景이라고 불렀다.

 

 

 

 

 

 

 

 

 

 

 

 

 

 

 

 

 

 

 

 

 

 

 

 

 

 

 

 

 

석문 선생의 높은 정신세계와 시경을 음미할 수 있는 경정잡영敬亭雜詠과 서석지의 진정한 가치에 대하여 좋은 연구 자료가 있어 소개한다.

 

“서석지의 돌 하나하나에는 이름 뿐 아니라 시詩가 붙어 있다. 서석지 정원의 각 부분을 노래한 <경정잡영>敬亭雜詠에 담긴 시들이다. 혹자는 이 시적 풍경을 음미하지 않고는 서석지 정원을 제대로 즐길 수 없다고까지 얘기한다. 이른바 ‘시경’詩景이다.

 

돌은 안으로 아름다운 글을 머금고도

오히려 그 있음을 나타내기 꺼리는데

사람은 어찌 실속에 힘쓰지 않고

명예만 얻으려고 급급하는가

 

- 정영방, ‘상경석’尙絅石 (서석지를 읊은 <경정잡영> 中)

 

 서석지는 연못을 거닐다 돌에 내려서서 시를 읊는 정원이었다. 구름, 하늘, 바람을 담은 돌의 풍취 앞에 물끄러미 쪼그리고 앉으면, 돌 하나가 가만히 시간을 멈춰 세운다.

 

 서석지가 이름난 것은 연못이 있는 내원內園의 아름다움 때문만이 아니다. 서석지는 몇 십 만평에 달하는 외원外園을 거느리고 있다. 영양 입암면의 문암에서 시작해 서석지로 들어가는 길 주변과 일월산까지 계곡을 따라 펼쳐진 기암괴석의 그림같은 경관이 그것이다. 서석지로 향하는 길에 선바위가 보인다. 영등산에서 시작된 산맥과 일월산에서 시작된 산맥이 만나고, 청기천이라는 강물이 만나 세 갈래의 기가 모이는 곳이라 한다. 선바위는 외원의 핵심을 알리는 곳이자, 내원으로 드는 입구이기도 하다.

 석문선생은 이 외원의 경관 곳곳에도 이름과 시를 지어 붙였다. 내원을 구성하는 돌들은 이 외원을 이루는 기암괴석과 자연 경관의 축소판이다. 가령 외원의 구포암龜浦巖은 내원의 선유석僊遊石과 그 모양과 위치가 비슷한 식이다.

게다가 외원과 내원을 이루는 암석이 영양에선 보기 힘든 화강암이다. 외원의 화강암 석맥石脈이 땅 속으로 서석지 정원의 연못까지 이어져 와 내원 연못의 돌을 이루고 있다. 결국 주변의 자연 경관을 그대로 정원 앞마당으로 끌고 들어온 셈이다.

 

 서석지는 얼핏 연꽃과 웅장한 은행나무가 눈길을 끈다. 하지만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연못 가득한 돌이 보여주는 깊고 냉정한 풍모에 빠져들고, 서석지를 벗어나면 광대한 외원의 풍류에 젖어들게 된다.“

( 출처 : <한국의 정원> 김진용 기자 )

 

 

 

 

 

 

 

 

 

 

 

 

 

 

 

최근에 런던올림픽이 시작되기 전만해도 ‘대통령의 형님’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었다. ‘만사형통 萬事兄通’이라는 신조어가 생길만큼 그 폐해는 심각했지만, 2012 여수엑스포와 런던올림픽에 묻혀서 벌써 잊혀 지기 시작하였다.

 

 영양 서석지의 아흔 개 가까운 바위 중에 탁영반 濯纓盤이라는 이름을 가진 바위가 있다. ‘탁영’이란 ‘갓끈을 씻는다’는 뜻으로,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물이 더러우면 발을 씻는다는 말로, 세상에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알고 지혜롭게 은둔하는 선비들의 출처지의 出處之義 정신을 나타낸다.

 실제로 탁영반은 연못에 물이 많으면 물속에 잠기고, 물이 줄어들면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석문 선생의 작명정신과도 기막힌 조화를 이루는 바위이다.

 

 4년 전에 ‘대통령의 형님’이 이 탁영반의 지혜를 깨우쳤더라면,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알고 반대로 처신했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지금쯤은 존경받는 원로정치인으로 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동생이 대통령이 된 것은 기회가 아니라 은인자중해야할 시기였던 것이다.

 

 예로부터 우리의 선조들은 특별한 형체도 색깔도 없는 돌과 바위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보였다. 결코 자신을 드러내거나 과시하지 않고, 숱한 시련과 풍상을 겪고서도 언제나 변함없이 의연하고 당당한 바위의 모습에서 고매한 지조와 기상를 발견하고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그 높은 기품을 노래하였고 사람들에게는 경계와 교훈으로 삼았다.

 그 옛날 석문 정영방 선생은 사람들의 왕래가 잦지 않는 이곳, 영양군 입암면 연당리에 연못을 만들고 경정잡영 32수를 남겨서 후손들에게 교훈으로 삼게했고, 석문선생 문집에서 '서석'이라 이름붙인 이유를 각별히 설명해 놓았다.

 

'돌의 속은 무늬가 있어도 밖은 검소하다.

인적이 드문 곳에 갈무리되어 있으니 마치 선한 사람, 고요한 여인이 정조와 청결을 지켜 스스로 보존함과 같다.

또한 세상을 은둔한 군자가 마치 덕의德義를 쌓아 둔 채 가슴 속에 보존된 것을 밖으로 표출하지 않는 것과도 같다.

그렇게 귀하게 여길 만한 실상이 있으니 상서로움이 아니겠는가!

 

어떤 이는 진옥眞玉이 아닌 돌이라고 싫어하지만, 그것은 그렇지 않다. 만약 그 서석이 과연 옥이라면 내가 소유할 수 있었겠는가.

설령 내가 소유하였더라도 화근이 되지 않겠는가.

만일 옥과 비슷하면서 옥이 아니라면 이는 한갓 아름다운 이름만 훔친 것이고 용도에는 부적합하다.

이는 도리어 세상을 속이고 이름을 도둑질하는 어리석은 일이니 없는 것만도 못할 것이다.

 

그런 이치로 이 연못에 있는 이 평범한 돌들을 어찌 상서로운 돌이라 하지 않겠는가!'

 

 

 

 

                                                                                                                     2012. 08. 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