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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이야기 ■/전통건축 이야기

주거건축-029. 안동 임청각 - 대통령의 꿈

 

 

 

 

 

 

 

 

 

 

          주거건축-029 안동 임청각과 군자정

 

          - 초대 대통령의 꿈-

 

 

 

 

 쉼 없이 남으로 달려온 태백산맥의 끝자락, 낙동강과 반변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 안동은, ‘가장 한국적인 고장’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데, ‘경북 안동’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무엇일까? - 하회마을, 하회별신굿탈춤, 도산서원, 양반고을, 안동포, 안동소주 - 정도 등이 주로 언급되겠지만, 나에게는 제일 먼저 연상되는 단어가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이다.

 

 지자체를 대표하는 문구로는 단연 으뜸이라는 생각을 안동을 지날 때마다 하게 되는데, 지자체 홍보 구호 중에서 ‘환경 수도’, ‘경제 수도’를 표방하는 지자체는 노력과 검증이 필요한 부분이고, ‘공장하기 좋은 X X'는 상대적으로 주거환경이 열악해짐을 간과한 근시안적인 구호라는 생각도 든다.

 

 한 국가의 수도를 결정하는 척도를 인구나 교통, 자원, 경제력 등이 아닌, 정신문화의 자산과 수준 등으로만 선택한다면 우리나라의 수도가 안동으로 옮겨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안동의 서쪽 관문 서의문 (2012. 11.) 

 

 

 

 

그러면 안동이 정신문화 부분에서 우리나라의 최고임을 당당히 내세울 수 있는 그 저력은 무엇일까?

안동시의 주장을 요약해보면, 안동은 우리나라 유교정신문화 교육의 총본산으로서 유교문화 뿐 아니라 불교문화 등 각 시대별로 다양한 전통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으며, 국내 유일의 지역학인 ‘안동학’이 존재하고, 평생학습도시를 기치로 선비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예절과 전통이 존중받는 인보협동의 도시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독립운동의 성지라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겼던 암흑기에 안동지역은 독립운동의 발상지였고, 항일 저항운동의 중심지역으로서 숱한 희생과 역경 속에서도 민족의 얼과 정신을 지켜냈던 곳이다. 그 안동지역 항일 독립운동사의 중심에는 천전리의 의성김씨 가문(주거건축-015 안동 의성김씨 대종가 참조)과 법흥동의 상해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의 고성이씨 가문이 있었다.

 

 

 

 

법흥교에서 바라본 영남산과 임청각 (2012. 11.) 

 

 

 

 

 

 

 

 

 안동시내 동쪽 끝의 법흥동은 신라시대 때 법흥사란 절이 있어서 법흥골로 불렸고 고성이씨 들이 정착하여 살면서 마을이 형성된 지역이다. 옛날에 절이 있었던 곳이라 국보 제16호인 ‘안동 법흥동 칠층전탑’이 마을 중심에 있고, 탑을 좌우로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중요민속문화재 제185호)’과 ‘안동 임청각(보물 제182호)’이 있다.

 

임청각이 자리 잡은 법흥동은, 조선시대 세종임금 때 영의정을 지낸 이원 선생의 아들인 이증 선생이 이곳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터를 잡고 뿌리를 내린 후, 이증 선생의 아들로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 선생이 

1519년(중종 14년)에 별당형 정자, 군자정과 본채 임청각을 지었다.

임청각臨淸閣이라는 이름은 중국의 도연명이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 중

“登東 而舒嘯 臨淸流而賦詩”

(동쪽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는다)

에서 ‘臨淸’ 두자를 따왔는데 주변 자연환경과 아주 잘 맞아떨어지는 작명이었지만 훗날 큰 시련을 겪게 된다.

 

임청각은 고성이씨의 대종가집으로 정자가 딸린 99칸 규모의 대저택이다. 일제가 집 마당 안으로 중앙선 철길을 부설하면서 대문채와 일부 행랑채가 뜯겨나가 지금은 70칸 규모로 줄었지만, 강릉 선교장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현존하는 살림집 중에서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임진왜란 이전에 제대로 지어진 건물이다.

집 마당 안으로 철길이 생긴 사연은 이 집안 출신 독립운동가 석주 선생과 관련이 있는데 그 이야기는 잠시 뒤로 미루고 먼저 임청각의 입지조건부터 살펴보자.

 

 

 

 

임청각 전경 (2012. 11.) 

 

탑동파 종택과 칠층전탑 (2004. 10.) 

 

군자정에서 본 무산 풍경 -1 (2012. 11.) 

 

사당에서 본 낙동강 풍경 (2012. 11.)

 

 

 

 

 

 임청각의 대하소설과도 같은 500년의 파란만장한 역사는 조용헌 교수의 ‘오백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에 잘 나와 있다. 그 중에서 임청각의 주변입지 부분만 살짝 발췌해 보았다.

 

“......먼저 임청각이 자리 잡은 터를 살펴보자. 뒤로는 산이 있고 앞으로는 강물이 흐른다. 교과서적인 배산임수의 터다. 뒷산의 이름은 무엇인가. 영남산이다. 태백산 줄기가 남쪽으로 내려와 문수산이 되었고, 이 문수산이 다시 200리를 달려와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맺힌 산이 해발 250m 가량의 영남산이다.

 

집터 앞으로 흐르는 물은 낙동강이다. 태백산 황지에서 발원하여 400여 리를 흘러왔다. 낙동강은 강폭이 임청각 앞에 이르러 병목처럼 좁아진다. 무산(巫山) 때문이다. 무산은 임청각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앞산에 해당하는데, 바로 강 건너편에 있다. 산이 그리 높지도 않고 험하지도 않은 적당한 높이의 산이다.

 

낙동강은 이 무산과 임청각 사이를 통과하면서 강폭이 좁아진다. 작은 협곡을 형성하는 셈이다. 추측건대 무산이라는 이름도 양쯔(楊子) 강의 무협(巫峽)을 염두에 두고 붙인 것 같다. 강폭이 좁아지다 보니 임청각에서 보면 낙동강이 그리 큰 강으로 보이지 않는다. 큰 강이 주는 위압감이 덜 느껴진다는 말이다. 안동댐이 들어서기 전에는 물이 ‘S’자로 흐르면서 중간 중간에 하얀 모래사장을 만들어 놓았다. 그 모래사장 사이로 만년이 넘게 푸른색을 띠며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의 서정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중략>

 

임청각에서 고개를 우측으로 돌리면 두 줄기의 물이 합수(合水)되는 곳이 나온다. 즉, 무산의 끝머리에서 낙동강과 반변천(半邊川)의 물줄기가 합쳐진다. 반변천은 일월산에서 시작해 영양·진보·청송의 물이 합쳐져 안동대 앞으로 흘러 안동 시내의 무산 앞에서 낙동강과 만나는 것이다.

 

이 만나는 지점을 와부탄(瓦釜灘)이라고 부른다. 옛날에는 와부탄 주변에 넓은 백사장이 형성되어 있어 하얀 갈매기들이 무리지어 놀았다고 한다. 그 아름다운 풍광을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인근에 콘크리트 건물들이 들어서 그 경치가 망가지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일제 때 임청각 앞으로 중앙선 철도를 놓는 바람에 임청각이 지니고 있던 낭만적 풍광은 절단나고 말았다......“

 

 

 

   

임청각 진입부.  오른쪽 방음벽 너머가 중앙선 철길이다 (2012. 11.)

 

군자정에서 본 무산 풍경 - 2 (2012. 11.) 

 

 

 

 

 임청각의 구성은 1000여 평의 넓은 대지에, 안채, 사랑채, 중랑채, 행랑채, 사당 그리고 별당형 정자, 군자정으로 이루어져 있고, 헐려 사라진 대문간채의 2층 누각에서는 집 앞 낙동강에 낚싯대를 드리울 수 있을 정도로 운치 있고 대단한 집이었다 한다.

 

 집의 방향은 동남향이고, 대지의 경사가 급하고 강가에 바짝 붙어있는 불리한 지형조건으로 인해서 건물배치는 영남산 기슭의 비탈진 경사를 따라 수평적으로 펼친 횡적인 배치를 택했다. 그래서 임청당의 몸채는 옆으로 아주 긴 독특한 평면구성을 가지게 되었고, 몸채의 우측으로 군자정이 있고 연못을 지나 높은 언덕위에는 사당이 있다.

 몸채는 크게 나누어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일 위쪽에는 안채와 사랑채가 일렬로 배치되었고, 가운데는 안행랑채가 있고, 그보다 한단 아래쪽에 바깥 행랑채를 아주 길게 두었다. 그리고는 그 건물들을 수직방향으로 날개채로써 연결하였다. 그래서 다양한 크기의 5개의 마당을 가진 상당히 폐쇄적인 중정형 평면구성을 가진 몸채를 완성하였다.

 

 집을 지을 때 그 평면구성을 일日, 월月, 길吉 등의 글자 형태로 지으면 좋다고 하는데 이는 하늘의 일, 월을 지상으로 불러서, 천지의 정기를 화합시켜 생기生氣를 받으려는 의미가 있다고 하는데, 임청각의 평면구성을 보면 日자와 月자가 합해진 용用자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아울러 남녀와 계층별로 매우 뚜렷한 공간 구분을 지어 건물의 위계질서를 분명히 하였다.

 

 

 

 

임청각 전경 - 1 (2012. 11.) 

 

임청각 전경 - 2 (2004. 10.) 

 

 

임청각 전경 - 3 (2012. 11.)

 

  

 

 

유홍준 교수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3>의 안동 편에서 임청각의 특이한 집구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 이 집은 김봉렬 교수의 말대로 “우선 규모에 놀라고 다양한 기능이 체계적으로 조합된 공간 조직에 놀라게 된다”( <한국의 건축>, 공간사 1985 ). 쓸 용(用)자형으로 반듯하게 구성된 이 양반집은 살림채, 사당, 별당(군자정)으로 구분되고 살림채는 또 안채, 중채, 사랑채, 행랑채로 나누어져 있는 데 이 복잡한 구성과 기능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는 마당의 운용이 탁월하여 다른 대갓집에서 느끼던 숨 막힐 듯한 답답함이 없다.

이 집에는 크고 작은 다섯 개의 마당이 있다. 안마당(중정), 사랑채마당, 행랑채마당, 대문진입마당 그리고 헛간마당 등 다섯이다. 그런데 이 마당들은 각기 자기 기능에 알맞은 크기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레벨을 몇단으로 나누어서 대문진입마당과 사랑채마당 사이에는 2.5m정도 높이의 차이가 난다.

이로 인해 외용상의 권위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한옥의 온화한 정취도 함께 살려내는 데 성공했다. 같은 대갓집이면서도 경주 안강 양동마을의 여강 이씨 향단이 사랑채, 안채, 행랑채를 한 몸체로 엮어서 여백의 묘를 살리지 못했던 것을 생각할 때 임청각의 마당 운용은 더욱 돋보이는 것이다.....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3, 창작과 비평사 )

 

 

 

 

 

 

임청각 안채 - 1 (2011. 04.) 

 

 

 

 

 

임청각 안채 - 2 (2011. 04.) 

 

 

 

 

 

 

 독특한 평면구성 외에도 이 집에는 특별한 방이 하나 있는데 그곳은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 앞쪽에 있는 산실産室로서, 앞에 우물이 있어 우물방으로도 불리는 곳이다.

집안의 지기가 뭉쳐 있는 이 산실방에서 정승 3명이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된 신령스러운 방으로 알려져 있다. 그 정기를 받았음인지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 선생이 태어났고 외손外孫으로는 좌의정 류후조 선생이 태어났고 그리고 9명의 독립유공자들이 이곳에서 배출되어 일제의 폭압으로부터 나라를 구했다.

 

 

 

 

 

좌측이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출입구이고 우물 뒤쪽 방이 산실이다  (2012. 11.) 

 

                              사랑채의 일자형 서까래 (2012. 11.)

 

임청각 사랑채 (2012. 11.)

 

 

 

 

 

 

 산실에서 담장너머로 마주보이는 군자정君子亭은 영남산 기슭의 전망좋은 위치에 자리 잡은 임청각의 별당형 사랑채이다. 평면이 ‘丁’자를 옆으로 누인 형태를 띠고 앞면 3칸, 측면 2칸 크기의 규모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정자의 중심은 남쪽으로 향한 4칸의 대청마루이고, 그 서쪽에 이어서 덧붙인 4개의 온돌방이 있다.

 

 정자의 천정에는 단청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고, 이곳을 찾았던 시인묵객들이 남긴 시가 적힌 현판과 석주 선생이 독립운동을 위하여 삭풍이 몰아치는 중국으로 떠나며 남긴 ‘거국음去國吟’이라는 시도 걸려 있다.

 

 

 

 

                              군자정 -1 (2012. 11.)

 

 

군자정 -2 .  뒷편이 몸채이다 (2004. 10.) 

 

군자정 - 3 (2004. 10.) 

 

 

 

 

 

 군자정 옆의 연못 위쪽에는 문중의 사당이 있는데 언덕 위에서 오백 년동안 가문의 성쇠를 묵묵히 지켜봐 왔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사당에는 원래 불천위와 4대의 조상 위패를 함께 봉안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텅텅 비어 있는 상태이다. 문중 대종가집의 사당에서 조상의 신위가 사라진 기막힌 사연은 무엇일까? 그 안타까운 사연은 1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일합방으로 나라를 빼앗기는 위기를 맞은 안동의 혁신유림들은 '공맹은 시렁위에 얹어 놓고 나라부터 구하자!' 며 떨쳐 일어났다.

당시 임청각의 종손 석주 이상룡 선생은 조선말기 의병항쟁에 참가하면서 독립운동에 발을 내디딘 후, 1909년에는 대한협회안동지회를 만들어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고, 1910년 나라가 망하자 “무릎을 꿇고 노예로 사느니 서서 싸우다 주인으로 죽겠노라!”라는 시를 남기고 일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하는 고난의 길을 택했다.

 

 1911년 1월, 집안의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너희들도 이제 독립군이다”라며 노비들을 해방시켰고, 나라를 되찾을 때까지는 조상의 봉제사도 어려우리라고 판단하고 사당에 모셔 놓았던 조상의 위패를 뒷산에 파묻고, 임산부까지 낀 가족들을 데리고 엄동설한에 걸어서 서간도로 떠났다.

 

 

 

 

 

사당 전경 - 1 (2012. 11.) 

 

 

사당 전경 - 2 (2012. 11.) 

 

 

 

 

 가족들의 고생과 망명정부의 설움이야 이루다말할 수 없었지만, 독립군을 육성하기 위해 경학사, 부민단, 한족회, 서로군정서를 이끌었고, 1925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지금의 대통령)에 올라 민족운동계의 최고지도자 자리에 올랐다.

 1932년 타국만리 비새는 집에서 서거할 때까지 조국의 해방과 독립운동단체를 통합시키는 일에 온 힘을 쏟았던 진정한 ‘안동의 자존심이자, 조선의 선비’였다.

“나라를 찾기 전에는 내 유골을 고국으로 이장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고, 아들과 손자 3대를 비롯하여 9명의 임청각 출신들이 그 뜻을 받들어 광복을 맞을 때까지 온갖 어려움을 견뎌내며 항일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임청각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친일파 후손은 대대로 잘먹고 잘살고 독립운동가 집안은 3대가 망한다’라는 서글픈 이야기처럼, 임청각의 후손들에게는 험한 가시밭길이 이어졌다. 일제는 임청각의 맥을 끊기 위해서 마당앞으로 철길을 내는 만행을 저질렀고, 석주 선생이 만주에서 순국하자 귀국한 아들과 손자가 일제의 호적제도를 거부함에 따라 임청각의 집과 대지는 다른 친족 4명의 이름으로 등기된 채 70년 동안이나 방치됐다. 그리고 석주 선생의 아들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 순국했고, 옥중에서 해방을 맞았던 손자는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다 빨갱이로 몰려서 고문 후유증으로 어린 자식들을 남긴 채 숨졌다. 그래서 선생의 증손자들은 자신의 뿌리도 모른 채, 한때 고아원 신세를 지기도 했었다.

 

 

 

 

 

임청각 안행랑채  (2011. 04.) 

 

 

 

 

 

 

 "석주의 직계 증손자 이항증씨는 2003년부터 임청각의 소유권을 정리하려고 나섰다. 그러나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명의신탁한 4명의 후손이 68명으로 늘어나 소유권 자체가 불투명해졌기 때문이다. 발이 닳도록 뛰어 61명에 대해서는 2003년 확정판결을 받았지만, 나머지 7명은 생사 불명, 이민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서류를 송달할 수 없어 미결 상태다. 임청각을 국가에 헌납하려 했지만, 소유권이 불분명해 그마저 할 수 없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의 집이 광복 65년이 되도록 소유권 정리조차 안 된다는 게 말이 됩니까? 등기를 바로잡으려고 애쓰는 동안 온갖 모욕을 당했어요. 국민고충처리위원회, 법률구조공단도 가봤지만 찬밥 신세였어요. 변호사들도 소송을 안 맡으려 하고. 일만 많고 실익은 없기 때문이죠. 2003년 재판 시작하면서 관련자 68명에게 복사해서 보낸 서류만 5만5,000장이었습니다. 안동시와 경북도가 임청각에 석주 선생 생가라는 표지판을 세운 지 10년이 넘었는데, 국가보훈처는 지난해 5월에야 임청각을 현충시설로 지정해 줬어요. 소유권자가 신청해야 한다는 이유로요. 이래서야 누가 나라를 위해 싸우겠어요?"

 

크고 아름다운 집 임청각을 두고도 남의 집 처마 밑을 전전하고, 학교를 다니기 위해 여동생과 함께 고아원에서 자라야 했던 고초는, 그는 말하기 싫다고 했다. "역효과만 나지 않겠어요? 독립운동하면 저렇게 망한다고 할 것 아닙니까?" (출처 : 임청각 홈페이지)

 

 

 

 

 

 

임청각 바깥행랑채 - 1 (2012. 11.) 

 

                              임청각 바깥행랑채 - 2 (2012. 11.) 

 

 임청각 바깥행랑채 - 3 (2012. 11.) 

 

 

 

 

 

 

 석주 선생은 임청각을 팔아 독립운동 군자금을 만들었고 가족들의 생명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지만, 해방된 조국은 선생을 잊었다. 보상은 커녕 후손들에 대한 당연한 배려도 원칙만을 내세우며 철저히 외면했다.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들이 처벌을 받지 않고, 나라를 위해 싸운 애국지사와 후손들이 온갖 고초를 겪어야하는 전철이 되풀이 된다면 선비정신마저 사라진 요즘 세태에서는 국가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사람은 결코 다시 나오지 않을 것이다.

 

 

 

 

 

 

 

 

 지난 토요일 JTBC 방송의 ‘신의 한표’라는 프로그램에서, 우리나라의 역대 10명의 대통령에 대한 인기투표를 명동에서 길가는 시민을 상대로 벌였다. 결과는 노무현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고 1위는 노무현 대통령이 차지했다. 노대통령이 1등을 한 것은 당연한 결과이고, 박대통령이 2등을 한 것은,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시킬 수 있느냐는 측면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고, 4대강을 우습게 본 현역대통령은 순위에도 들지 못했다.

 

 대한민국의 헌법전문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로 시작된다.

따라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 석주 선생을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대접하더라도 하등의 모순이 없을 것이며, 세계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들만큼 조국의 독립에 큰 발자취를 남긴 석주 선생과 임청각 사람들의 희생을 결코 잊지 않는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최소한의 도리일 것이다.

 

 지금, 18대 대통령을 뽑기 위한 선거전이 한창이다. 안철수 후보는 ‘아름다운 양보’로서 군자의 길을 실천했고, 나머지 판세는 아직 오리무중이다.

 

백 년 전, 석주 선생이 99칸 임청각을 비워두고 풍찬노숙風餐露宿의 길을 떠나며 ‘거국음去國吟’을 읊었던 그 심정과 꿈을, 차기의 새대통령이 십분의 일이라도 이해하고 실천한다면 나는 그 새대통령을 위대한 대통령이라고 부를 것이다......

 

 

 

     去國吟      조국을 떠나며

 

 

山河寶藏三千里      더없이 소중한 삼천리 우리 산하여

 

冠帶儒風五百秋      오백년 동안 예의를 지켜왔네.

 

何物文明媒老敵      문명이 무엇이기에 노회한 적 불렀나.

 

無端魂夢擲全甌      까닭 없이 꿈결에 온전한 나라 버리네.

 

 

已看大地張羅網      이 땅에 그물이 쳐진 것을 보았으니

 

焉有英男愛髑髏      어찌 남자가 제 일신을 아끼랴.

 

好佳鄕園休悵惘      고향 동산에 잘 머물며 슬퍼하지 말지어다.

 

昇平他日復歸留       태평성세 훗날 다시 돌아와 머물리라.

 

 

 

 

 

                                                                                                                          2012. 12.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