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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 갤러리 ■/여 행

밀양 의열기념관 (2022.06.18.)

 

 

 

 

 

 

 

 

 

 

의열단(義烈團)

 

 

191911월 만주 지린성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 독립운동 단체로서 쉽게 말해 대일 무장 단체였다.

 

의열단은 의로운 일을 맹렬히 추진하는 단체의 약자다.

이 단체를 발족한 약산 김원봉은

3.1 운동의 대중화 단계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조선인을 보고 크게 감동하였다.

이로써 의열 투쟁 결사대를 조직하여 암살파괴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국내 동포들의 독립 정신을 환기시키고,

나아가 이를 통하여 국내외 한인을 중심으로 혁명을 촉발함으로써

민족의 독립과 조국의 광복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이 같은 구상 아래 김원봉은 191911

윤세주, 이성우, 곽경, 이종암 등의 동지들과 지린성(吉林省)에서

의열단을 발족하였다.

 

창단 당시의 단원은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중심이었다.

그리고 단장을 비롯해 김대지, 황상규가 고문을 맡았고,

단원은 김원봉, 윤세주, 이성우, 곽경, 강세우, 이종암, 한봉근, 한봉인, 김상윤,

신철휴, 배동선, 서상락, 권준의 13명이었다.

단장은 김원봉이 맡았다.

'13명은 광복 때까지 단 1명도 배신하지 않았다'는 표현으로 매우 유명하다.

한편 이 13명 중 단장 김원봉을 포함해 5명이 같은 밀양 동화중학교 출신으로,

서로 이웃사촌 관계였기도 하다.

 

창단 직후 "공약 10"와 뒤에 "5파괴", "7가살"이라는

행동 목표를 독립운동의 지침으로 채택하였다.

하지만 암살과 테러를 위한 전문 교육이나 훈련을 받지 않았던 탓에

(사실 당시에는 가르쳐줄 사람이나 단체도 없었지만)

작전의 실행에 허술한 점이 많아 암살 대상의 자택 앞에서 귀가할 때를 기다리면서

술을 마시다가 졸아서 놓치는 등 실패할 때가 많았다.

이들 중에는 김시현 열사가 있는데, 그는 광복 후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되었다.

또한 시인 이육사도 의열단 단원이었다.

 

비밀 결사 조직인 탓에 단원이 정확히 몇 명이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그러나 2010년에 기밀 해제된 영국의 비밀 문서에 의하면

단원이 무려 2천여 명에 달했으며, 도쿄에도 50여 명이 상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미국의 작가 님 웨일즈는 김산을 인터뷰해 저술한 <아리랑>에서

1927년까지 체포돼 처형당한 의열단원이 무려 700명에 달한다고 기록했다.

이 정도의 규모가 외부에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은 정말로 대단한 사실이다

(글 출처 : 나무위키)

 

 

 

 

 

 

 

 

 

 

 

 

 

 

 

 

밀양은 영남 지방 최초이자 최대의 만세운동,

3·13 만세 의거가 시작된 지역으로써 항일 무장독립단체인

의열단 창립 단원 4명이 태어나서 자란 지역이며

신간회와 청년 계몽운동, 대종교 기반의 독립운동, 

그리고 신민부와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자금 모집의 거점인

지역이기도 합니다

 

밀양은 독립운동가가 많이 배출된 도시로 유명한데

그 중에서도 해천 주변은 많은 독립운동가 출신들이 많은 편으로써

밀양이 배출한 독립운동가 82명 가운데 26명이 이곳 출신입니다.

 

항일 무장독립단체인 의열단을 이끈 약산 김원봉 선생, 

의열단원이자 3·13 밀양 만세운동의 주역 윤세주 의사가 이곳 출신이며

황상규,김대지,권잠술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어린 시절을 이곳 해천에서 보냈고

밀양 부북면에는 약산의 아내 박차정 의사의 묘소도 있습니다.

 

현재 독립운동가를 많이 배출한 해천주변 600 거리에

해천 항일운동 테마거리를 조성하였으며 중심에는 의열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2018 3 7일 약산 김원봉 장군의 생가터에 문을 연 의열기념관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충의(忠義)에 앞장 선 사람을 뜻하는

 의열(義烈)”의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독립운동의 참 가치를 보여주기 위해 전국 최초로 건립된 기념관입니다.

 

의열단 창립단원 10인 중에는 단장인 약산 김원봉을 비롯해

김상윤, 윤세주, 한봉근 등 4명이 밀양 출신이며

 의열기념관이 세워진 해천 항일운동 테마거리 일원인 내일동과 내이동에서만

밀양지역 독립운동 서훈자 81명 중 26명이 배출될 정도로

전국에서 유일한 독립운동가 밀집지역 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밖에 의열단의 고문 황상규, 김대지와

의열단 창립 당시의 조력자 그룹인 윤치형, 이병철 등도 밀양 출신입니다.

 

의열기념관 앞을 흐르는 해천 일대 산책로에는

밀양의 만세 운동과 다양한 독립운동의 모습을 벽화로 생생하게 표현했으며

치열한 독립운동의 흔적을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김원봉과 의열단의 독립투쟁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2015 1,200만명의 흥행을 올린 영화 암살》​이 계기가 됐습니다. 

김원봉 의열단장은 해방 후인 1948년 월북해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 최고위직을 지낸 탓에

남한에선 금기시 되온 인물이기 때문에 김원봉이라는 인물과

 의열단의 독립투쟁의 역사는 밀양의 몇몇 학자의 연구만으로

조용히 진행되어 왔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 내내 해외에서 항일 독립 투쟁에 앞장선 약산 김원봉은

해방 뒤 고국으로 돌아와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 운동에 헌신했지만

미군정이 다시 고용한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체포되어 온갖 수모를 겪고, 

뜻을 함께한 여운형마저 암살당하는 등 남한에서 활동은 고난과 위협,

 테러의 연속이었습니다.

 이에 마지막으로 분단을 막기 위해 김구,김규식과 같이

삼팔선을 넘어가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한 김원봉은 남한으로 결국 돌아오지 않았고

이후 북한 정권에 참여했으나 1958년 김일성에 의해 숙청되어

현재는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다고 합니다.

 

 

영화암살》​로 인해 김원봉과 의열단의 독립투쟁이 알려지자

밀양시는 2016 4월 내이동 해천을 중심으로 의열단의 독립운동정신을 기리기 위해

의열기념관을 현재 해천 인근 김원봉의 생가터에 세웠습니다.

 

 

 

 

 

 

 

 

 

 

 

 

 

 

 

 

 

 

 

 

 

 

 

 

 

의열기념관 1, 2층에는

의열단 역사, 인물 사료, 의열단원의 삶, 유품 등을 전시했고 

3층 옥상은 포토존과 휴식공간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쉼터공간 옥상에는 광복의 기쁨과 평화로움을 상징하는 청동상과

석정 윤세주를 비롯한 해천 주변에 위치한 독립운동가들의 생가와

독립운동 주요 유적지를 소개하고 있으며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를 조망하면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의열기념관의 1층은 3개의 구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구역 (의열단라운지) : 의열투쟁의 얼굴들,의열투쟁 주요연표

 

2구역 (의열정신의 본향, 그 원동력은) : 애국정신과 종교의 단합, 민족교육의 요람들, 일제의 수탈과 밀양, 대한독립선언서, 밀양독립운동

 

3구역 (의열단의 정신과 조선혁명선언) : 의열 공약10, 의열단 강령20개조, 의열단 최고이상4개항목, 조선혁명선언

 

 

2층은 6개의 구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4구역 (의열단 초기활동의 현장) : 1919 11월 상하이 전경,반씨주택, 의열단창립의 배경과 의의

 

5구역 (젊은 혼불등,의열단원과의 만남) : 의열단 창단의 주역들

 

6구역 (일제의 심장에 폭탄을 던지다) : 창단이후의 의열단원, 최수봉의사 투탄조형물, 의열단의 투탄의거와 의미, 

나석주의사의 식산은행, 동양척식회사 투탄의거

 

7구역 (의열단,뜨거운 의거의 그날) : 최수봉의사의 밀양경찰서 투탄의거 영상(웹툰)

 

8구역 (의열단의 발자취) : 의열단에 부는 변화의 바람, 군사  정치운동으로의 노선 전환과 조직변동

 

9구역 (조선의용대의 탄생과 박차정의사) : 조선의용대의 탄생 배경 , 대륙의 불꽃 박차정 의사

 

[이상 글 출처] 경상남도 밀양여행 (의열단을 이끈 약산 김원봉 장군의 생가터에 세워진 '의열기념관' )

|작성자 자유로운 영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