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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건축 갤러리 ■/경 남 . 부 산

통도사 극락암 - 2 (2022.03.26.)

 

 

 

 

 

 

 

 

 

 

통도사 극락암

 

 

통도사에서 서북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극락암은

근현대의 고승인 경봉스님이 주석하셨던 곳으로 유명하다.

고려 충혜왕 복위 5년(1344)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며 창건주는 알 수 없다.

그 뒤 영조 34년 (1758)지홍대사가 중건하였고

1968년 이후 가람 전체를 경봉스님이 중건 중수하였다.

 

극락암은 한암 ,월하, 벽안 ,보안, 혜암스님 비롯하여

수덕사 전 방장 원담스님, 은해사 전 조실 일타스님, 해인사 원로 도견스님,

화엄사 전 주지 도광스님 등 제방의 조실스님들이 모두 이곳에서 정진하는 등

한강 이남의 제일가는 호국선원이라 할 수 있다.

 

선방인 호국선원 앞에는 영월루가 있고

연수당 수세전 독성각과 함께 33조사의 영정을 봉안한 조사당이 있다.

경봉스님의 거처였던 아담한 삼소굴과 함께 암자로서 매우 큰 규모이다.

암자 입구에 있는 극락영지는 영축산의 봉우리가 비치는 연못으로 유명하며,

연못을 가로질러 놓여있는 홍교와의 조화가 아름답다.

(글 출처 : 통도사 홈페이지)

 

 

 

 

 

 

 

 

 

 

 

 

 

 

 

 

 

 

 

 

 

 

 

 

 

극락암 단하각(丹荷閣)

 

단하각은 나반존자를 모신 독성각 이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극락암에서 가장 작은 전각이다.

건물의 내외벽에는 파랑 바탕에 흰 옷을 입은 선사를 그린 벽화가 있다.

독성인 나반존자는 석가모니부처님이 열반 때

미륵불의 출현을 기다리라고 부촉한 4명 중의 한명인 빈두로존자를 가리킨다.

말법시대의 중생에게 복을 주고 소원을 성취시켜 주는 분이시다.

 

경봉스님은 청도 운문사 사리암에 1934년부터 자주 가셨고,

극락암에 독성을 모실 가장 좋은 곳에 신상균이 만든 나반존자 소상을

1955년에 조성하여 봉안하였다.

단하각은 한국전쟁 이후 전쟁의 참화를 극복하고

신심과 재활의 의지를 북돋아 주기 위해 건립하였다.

 

부산, 울산, 경남뿐만 아니라 수도권에서도

독성기도의 영험이 널리 알려져 사업번창, 건강발원 등을 위해 찾아오고 있다.

특히 학업성취 효험이 있어 많은 이들이 기도를 하러 온다.

주련의 구절은 '대공양예참 전문' 중에서 따온 것이다.

 

霞衲半肩樂道(하납반견요도) 雪眉?眼觀空(설미부안관공)

노을빛 같은 가사를 오른 어깨는 드러내고 도를 즐기며

백설같은 눈썹이 눈을 덮도록 공을 관하도다

 

 

 

 

 

 

 

 

 

 

 

 

 

 

 

 

극락암 삼소굴

 

 

극락암은 1332년에 창건됐다.

극락선원(極樂禪院)이 있어서 늘 많은 수행승이 머물고 있다.

특히, 경봉(鏡峰)이 조실(祖室)로 온 1953년 이래로는 수행승들이 많이 몰렸다고 한다.

경봉은 통도사 주지를 두 번이나 지내셨다.

 

그는 선지식인으로는 드물게 70여년 동안 계속 일기를 썼다.

절에 가면 흔히 만나는 ‘해우소’(解憂所)라는 말은 경봉이 지은 말이다.

스님은 53년부터 82년에 “야반삼(夜半三更)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는 말을 남기고

입적하실 때까지 극락암에 머물렀으니,

극락암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삼소굴은 경봉 스님이 1982년까지 거처하던 곳으로 유명하다.

삼소굴이란 이름은 ‘호계삼소’에서 따왔다고 한다.

중국 동진 때 여산 동림사의 고승 혜원 스님과 유교의 도연명, 도교의 육수정은

친교를 맺어 자주 왕래했는데,

하루는 혜원 스님의 처소에서 다담(茶談)을 나누다가 헤어질 때

그만 청담에 취해 혜원 스님이 호계다리를 넘고 말았다.

일생 산문 밖을 나가지 않겠다던 혜원 스님의 금율이

다담 때문에 37년 만에 깨어진 것이다.

이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은 세 분 스님이 함께 웃었다는데,

이 일화를 후세 사람들이 ‘호계삼소’라고 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