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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 갤러리 ■/군북초등학교 동창회

남해 설흘산 다랭이마을 (2020.08.09.)

 

 

 

 

 

남해 다랭이마을 

 

 

남해는 통영과 여수로 이어진 한려수도의 중심지다.

남해를 육지와 연결하는 남해대교를 지나 남쪽으로 가면 망망대해가 펼쳐지는데

벼랑에 걸려 있는 마을이 바로 다랭이마을이다.

이 마을의 유래를 알면 전화위복 또는 새옹지마가 이런 경우를 뜻하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천마을의 옛 이름은 간천(間川)이었으나

조선 중기에 이르러 갈대가 많은 냇가에 자리 잡고 있다 해서 가천(加川)으로 바뀌었다.

'다랑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산골짜기의 비탈진 곳 따위에 있는 계단식의 좁고 긴 논배미'라고 설명되어 있으며

지역에 따라 '다랭이' 또는 '달뱅이'라고 불린다.

다랭이마을은 손바닥만 한 논이

언덕 위에서부터 마을을 둘러싸고 바다까지 이어진다.

정확히 말하자면 45도 경사 비탈에 108개 층층 계단, 10제곱미터밖에 안 되는 작은 것부터

1,000제곱미터에 이르는 것까지 680여 개의 논이 펼쳐진다.

이곳에서는 길, , 논 등 모든 것이 산허리를 따라 구불거리며 바다를 바라보고 있어

곡선 위의 오선지 같은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다랭이마을이 생기게 된 경위는 간단하다.

선조들이 산기슭에 90도로 곧추 세운 석축으로 한 평이라도 더 논을 내서

쌀을 확보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작은 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남해군 남면에 위치한 다랭이마을은 옛날 한 농부가 일을 하다가 논을 세어보니

논 한 배미가 모자라 아무리 찾아도 없기에 포기하고 집에 가려고 삿갓을 들었더니

그 밑에 한 배미가 있었다."

이처럼 작은 삿갓을 씌우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논이라 해 삿갓배미, 삿갓다랑이

또는 죽이나 밥 한 그릇과 바꿀 정도로 작다 해서 죽배미나 밥배미로 불린다.

 

다랭이 논은 이곳에 살지 않으면 안 되었던 주민들의 눈물과 땀으로 만든 땅이다.

위정자나 지주들의 착취와 전쟁 등을 피해 오지 중의 오지로 이주한 가난한 농민들은

돌투성이의 가파른 비탈을 개간해 논으로 만들었다.

걷어낸 돌로 논둑을 쌓고 물이 쉬 빠져나가지 않도록 점토나 흙으로 마감했다.

모든 일이 사람 손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들의 목표는 손바닥만 한 땅도

논으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수백 년 동안의 눈물겨운 노동으로 일구었으므로 계단식 논은 생태 가치가 높다.

토양 침식을 막고 물을 머금어 홍수를 줄이며,

산속에 습지를 조성해 생물 다양성을 높였다.

태풍이 종종 부는데도 유실된 논이 없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므로 일부 전문가들은 민초들의 고단한 삶이 예술로 승화되어

계단식 논이 되었다고 극찬한다.

현재에도 기계가 들어갈 수 없어 여전히 소와 쟁기로 농사를 지어야 하는 곳이 많지만

이런 열악한 환경이 오히려 천혜의 경관을 자랑하는 명소를 만들었다.

 

계단식 다랭이 논의 가장 큰 문제는 물을 어떻게 확보하느냐다.

천수답이 기본이지만 필요할 때 물을 제대로 공급할 수 없는 문제 역시 선조들이 슬기롭게 해결했다.

마을 자체가 설흘산과 응봉산을 등에 업고 있으므로,

위에서부터 고루 물을 댈 수 있게 수로를 각 논으로 연결한 것이다.

이를 만들기 위한 고통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다랭이마을 사람들이 어렵게 생활할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이유는

어촌인데도 남다른 환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바닷가 마을이라고 하면 어업이 주를 이룰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도 마을에는 포구가 없다.

이유는 마을 아래쪽 해변에 내려오면 금방 알 수 있다.

거친 파도와 많은 바위 때문에 조각배조차 정박할 공간이 없다.

더구나 태풍도 잦아 배의 쉼터가 되지 못해 남해에서 선착장이 없는

유일한 갯마을이다

 

이런 기후는 마을의 지붕들이 나지막하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매서운 바람에 번뜻한 집들이 남아나지 못한다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모를 리 없기 때문이다.

날씨가 좋을 때 마을 뒤 설흘산에 오르면 남해도의 바다와

서포 김만중의 유배지였던 늑도가 수평선 위로 아득하게 보이지만,

어업을 할 수 없었던 마을 사람들은 고단하게 살 수밖에 없었다.

 

다랭이마을은 얼마 전만 해도 한국에서 가장 연 평균 소득이 낮은 지역 중 하나였다.

현재 다랭이마을에는 58가구 15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데,

여자가 남자보다 약 1.5배 많을 정도로 생산력이 떨어진다.

하지만 선조의 땀이 밴 한 뼘의 역사가 희망이 되어 2002년 환경부는 다랭이마을을

'자연생태보존우수마을'로 선정했고,

2005년 문화재청은 명승 제15호로 마을 전체를 포함한 다랭이 논을 지정했다.

농림수산식품부도 다랭이마을을 '색깔 있는 마을'로 선정했다.

이뿐이 아니다. CNN에서 운영하는 CNN GO

'한국에서 가봐야 할 아름다운 50' 중 하나로 다랭이마을을 선정했는데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남해군 서쪽 최남단에 있는 작고 잘 보존된 다랭이마을은

탁 트인 바다 뒤에 있는 가파른 산비탈에 셀 수 없이 많은,

아주 작은 계단식 논의 기이한 광경이 특징이다."

 

다랭이마을은 국내외를 통해 유명세를 톡톡히 치렀고 그 효과는 그야말로 놀랍다.

빈한한 바닷가 마을에 불과했던 곳이 2011년만 해도 30만 명이 찾아올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고,

살기 어려운 척박한 땅이란 이름을 벗어던지면서 명승지로 자리 잡았다.

조상 대대로 가난을 면치 못하던 좁은 다랭이 논을

하나의 상품으로 바꾸는 데 성공한 것이다.

 

 

 

 

 

 

 

벼와 마늘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던 다랭이마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9년으로 고작 10여 년밖에 되지 않는다.

이 마을 출신 김종철 씨가 면장으로 부임하면서 마을 뒤쪽의 설흘산 등산로를 개발하면서부터이기 때문이다.

등산객들이 산에 올라 환상적인 경관을 보면서 입소문이 조금씩 나기 시작했다.

5년 만에 다랭이마을이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로 탈바꿈한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전화위복과 새옹지마가 이런 경우를 뜻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랭이마을 주민들이 이런 혜택에만 안주한 것은 아니다.

허물어져 가던 집을 고쳐 펜션과 민박 시설로 탈바꿈하고 마을의 주변 볼거리를 코스로 엮었으며

다랭이 만들기, 농사 체험 등 사계절 체험 프로그램을 만들어

몰려드는 관광객을 맞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골목마다 친절한 간판이 세워졌으며, 나무 난간으로 이루어진 산책로도 편리하게 조성했다.

지붕에는 알록달록한 꽃과 유자, 마늘을 큼지막하게 그렸고, 담벼락은 마을의 일상을 묘사한

각종 벽화로 장식해 탐방객들의 눈을 즐겁게 하고 있다.

 

척박한 환경을 탓하며 좌절과 숙명론에 빠지는 대신

약점을 특색과 장점으로 살리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천형'의 땅에서 '천혜'의 땅으로 변화한 것이다.

그렇다고 자연을 훼손하거나 망가뜨리지는 않았다.

깨끗한 환경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다랭이마을의 원천적인 경쟁력이자

매력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물론 다랭이마을은 다랭이 논으로 유명하지만

이제는 벼농사를 많이 짓지 않고 마늘 밭이 주를 이룬다.

다랭이 마을에서 마늘을 기르게 된 데는 이력이 있다.

남해에는 과거에 마늘 밭이 많았는데 어느 해 마늘을 심은 농가가 늘어나는 바람에

마늘 값이 폭락했다. 이때 마늘 밭에서 저마다 일정량의 마늘을 뽑아냈더니

마늘 값이 폭등해 오히려 소득이 좋았다고 한다.

남해의 마늘은 다른 지역보다 맵고 알이 굵어 질이 좋다는 평을 듣고 있다.

현재 많은 곳에서 마늘을 심는 까닭은 남해대교 등의 개통으로 뭍과 마을을 잇는 다리가 생겨나면서

유통이 편리해졌기 때문이다.

 

현재에도 마을 사람들이 마늘 농사를 짓지만 대부분 민박으로 생계용 직종을 바꾼 지 오래되었다.

마을에서 민박을 치지 않는 집을 찾기 힘들 정도이지만

먼 옛날 농토 한 뼘이 아쉬워 산비탈을 깎아 만들었다는 계단식 논과 마을의 풍광은 여전하고,

남쪽 바다는 변함없이 새파랗다.

(글 출처 : 과학문화유산답사기2 | 저자이종호 | cp명북카라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