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자료실 ■/스크랩 - 건축사신문(대한건축사협회)

서양근대건축사 산책(1) - 윌리엄 모리스와 필립 웹의 ‘붉은 집’(1859∼60)

 

서양근대건축사 산책(1) - 과거를 돌아보며 앞길을 열어두다: 윌리엄 모리스와 필립 웹의 ‘붉은 집’(1859∼60)

 

  • 기자명 김현섭 고려대학교 건축학과 부교수 
  •  입력 2012.07.16 17:21
  •  수정 2015.06.08 17:26

 

▲ 정원 쪽에서 본‘붉은 집’ ⓒ김현섭
 

본지는 이번 호부터 ‘서양 근대건축사 산책’ 코너를 마련해 서양 근대건축의 주요 장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총 24회로 마련된 이 코너는 단국대 강태웅 교수와 고려대 김현섭 교수가 번갈아 기고할 계획이다. 그 첫 번 순서로 영국 수공예운동의 출발점인 ‘붉은 집’을 찾아가 보았다.

 

‘서양 근대건축사’라는 커다란 숲을 거닐기 위해 아무래도 우리는 런던 근교 켄트에 위치한 ‘붉은 집’(Red House, 1859∼60)을 먼저 들러야 할 것 같다. 영국 수공예운동(English Arts and Crafts Movement)의 선구적 작품으로 간주되며 빈번히 근대건축사 책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그 주택 말이다. 이제 갓 결혼한 25세의 청년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96)와 그의 아내를 위해 28세의 신출내기 필립 웹(Philip Webb, 1831~1915)이 설계한 이 집이 역사의 한 장을 열게 될 줄을 당시 누가 알았으랴! 헤르만 무테지우스는 평한다. 이 집이 “새로운 예술 문화의 첫 번째 개인주택이고, 안팎을 통합된 하나로 구상하여 지은 첫 번째 주택이며, 역사상 가장 첫 번째의 근대주택 사례”라고(Das englische Haus, 1904). 그리고 이 같은 평은 건축사가 니콜라우스 펩스너에게 와서 역사적 실효성을 얻게 된다. 펩스너에 의하면 1914년 독일공작연맹의 발터 그로피우스에게서 성취된 근대주의 양식은 실상 모리스에게서 시작되었다(Pioneers of the Modern Movement, 1936).

▲ ‘붉은 집’의 기념 문패 ⓒ김현섭
 

‘붉은 집’은 단지 신혼집으로만 계획된 곳이 아니었다. 옥스퍼드 대학시절부터 다양한 문필가와 예술가 친구들을 곁에 뒀고, 스스로도 건축과 미술에 몰두한 바 있는 모리스는 이 집이 예술과 삶을 융합하는 본격적인 교류의 장이 되길 꿈꿨다. 조지 스트리트 건축사무소에서 만나 친구가 된 웹에게 건물 설계와 여러 가구의 디자인을 맡겼고, 화가인 에드워드 번 존스가 계단실 벽화를 그렸으며, 벽걸이 융단은 모리스가 스스로 디자인했다. 집의 지극히 사소한 부분까지도 예술적 열정으로 손수 제작된 것이다. 여기에는 기계화된 사회와 대량생산 상품의 저급성에 대한 강한 반동이 내재되어 있었다. 모리스의 동지들은 매 주말을 이 ‘예술의 궁궐’에서 즐겼는데, 더 나은 미적 수준의 일상용품을 제작하여 대중에게 보급한다는 목적으로 공예회사를 차리기에 이른다(Morris, Marshall and Faulkner & Co., 1861). 이 같은 활동과 이념은 ‘붉은 집’이 담았던 내용이자 사회주의 이상가 모리스의 젊은 시절 배경이라 하겠다.

 

▲ 1층 현관에서 본 계단실 ⓒ김현섭

 

허면 우리의 관심인 건축적 측면은 어떠한가? 우선 ‘붉은 집’이라는 이름부터 보자. 이 주택의 인상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말이기 때문이다. 외벽에는 붉은 벽돌이, 그리고 지붕에는 검붉은 타일이 집을 온통 뒤덮고 있다. 지금 우리에겐 그저 그렇게 보일지 모르지만, 19세기 중반의 영국에서 벽돌을 주재료로 하여 그대로 노출시킨 주택은 찾아보기 힘들다. 벽돌을 쌓았다면 회반죽으로 바깥을 마감하는 것이 당시 지배적이던 신고전주의풍 빌라의 당연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 집은 좌우대칭이나 비례 같은 규범과는 거리가 멀었다. 기능을 따라 L-자형 평면이 계획되었고, 이것이 외관으로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불규칙한 매스 구성과 창의 배열은 실내 공간의 솔직한 표출이다. 예컨대 L-자 평면 안쪽 모서리의 계단실은 전체 평면의 중심점이라 할 만한데, 외적으로 돌출된 매스와 지붕을 가졌고 계단의 오름에 따라 두 면의 창문이 다른 높이에 배치되었다. 건물의 나머지 부분 역시 마찬가지 원칙을 따른다 하겠다. 모리스와 웹은 이탈리아의 고전규범이 아닌 자국의 지역적 특성과 역사로 눈길을 돌렸다. 특히 중세 후기는 가장 이상적인 시점으로 참조된다. 그때는 신앙과 삶이 통합된 가운데 예술(공예)의 아름다움이 노동의 기쁨과 조화를 이룬 것으로 여겨졌고, 건축은 이 모두를 담는 그릇이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중세 이래 소박하면서도 기품 있고, 편안한 주택을 발전시켜왔는데, 웹이 선보인 고딕의 디테일은 그 같은 전통과 관계있다. 건물 내외부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뾰족아치나 경사가 급한 지붕이 대표적이다. 더욱이 지붕의 경우는 다양한 프로파일이 겹쳐지고 그 위로 솟아오른 굴뚝들과 조화를 이룸으로써 중세 고딕 마을의 불규칙한 실루엣을 연상시킨다.

 

그렇다고 ‘붉은 집’이 고딕양식을 외적으로 모방한 결과물은 결코 아니다. (필요에 따라 퀸앤 스타일의 섀시 창과 같은 상이한 건축 요소를 차용하기도 했으며, 고딕적 어휘 역시 상당한 주관성을 내포한다.) 너무도 당연하지만, 이것은 고딕의 이상과 소박한 지역 전통에 웹과 모리스의 창의력이 결합된 작품이라 하겠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사항은 이 젊은이들의 성취 뒤에 내재한, 당대 영국에서 무르익어가던 건축적 아이디어였다. 이는 오거스트 웰비 퓨진과 존 러스킨의 영향으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 퓨진이 1841년에 출판한 『기독교 건축의 참된 원칙(The true principles of pointed or Christian architecture)』 은 19세기 영국 건축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참고서로서, 건축에서의 ‘편의성, 축조성, 적절성(convenience, construction, propriety)’을 강조했고 고딕건축이 이에 가장 합당한 결과물임을 제시했다. ‘붉은 집’에 나타난 기능적 평면, 정교한 벽돌쌓기의 외적 표출, 부분과 전체의 구성 및 매스의 집합성은 퓨진의 원칙을 잘 드러낸다. 퓨진이 실천적 측면에서 필립 웹을 인도했다면, 러스킨의 아이디어는 사상적 측면을 뒷받침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1850년대 초 출판된 『베니스의 돌(The Stone of Venice)』에서 러스킨은 편만했던 그리스-로마의 고전주의와 르네상스의 건축원칙에 대항해, 보다 건강한 영국건축, 즉 고딕건축의 부활을 촉구한다. 지중해의 라틴 문화를 등지고 전설 속 북구로의 어렴풋한 근원을 추구했던 러스킨의 낭만성은 ‘해가 지지 않는’ 빅토리아 왕조의 젊은이들을 고무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붉은 집’이 함의하는 과거지향성과 지역성은 근대건축이 내세웠던 ‘시대정신(Zeitgeist)’과 크게 배치되는 것 아닌가? 기계를 이용한 대량생산, 보다 국제적인 보편성, 부유한 소수가 아닌 대중을 위한 사회성이 시대적 요청이었다면 말이다. 그러나 역사가 이 건물에서 주시한 바는 과거로의 노스탤직한 회귀라는 측면이 아니었다. 그것이 조명한 바는 그 다른 얼굴인 정직한 노동과 정신의 윤리성에 대한 강조였고, 일상용품의 예술적 가치 회복과 보급을 위한 노력이었으며, 건물 내적 기능의 솔직한 외적 표현이었다. 이런고로 ‘붉은 집’에서 촉발된 영국 수공예운동의 정신은, 예컨대, 잠자던 독일을 일깨워 ‘독일공작연맹(Deutsche Werkbund)’의 창설(1907)을 유도했고, 거기서 기계주의 대량생산 시스템과 만나 근대건축운동의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김현섭 고려대학교 건축학과 부교수 .
 
 

서양근대건축사 산책(1) - 과거를 돌아보며 앞길을 열어두다: 윌리엄 모리스와 필립 웹의 ‘붉은

본지는 이번 호부터 ‘서양 근대건축사 산책’ 코너를 마련해 서양 근대건축의 주요 장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총 24회로 마련된 이 코너는 단국대 강태웅 교수와 고려대 김현섭 교수가 번갈아

www.ancnew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