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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시론ㅣ우리의 도시는 정의로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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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시론ㅣ우리의 도시는 정의로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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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0호 3면
  • 입력 : 2023-07-31 14:51
  • 수정 : 2023-07-28 14:52

 

우리의 도시는 정의로운가? 우리 도시가 사회와 공동체를 위해 옳고 바르게 만들어졌고 그렇게 운용되고 있는가? 생소할지는 모르나 어려운 질문은 아니다.

21세기 벽두에 열린 베니스 건축비엔날레의 표제는 「덜 미학적인, 더 윤리적인(Less Aesthetics, More Ethics)」이었다. 완결된 형태를 미의 완성으로 보았던 서양건축이 도리나 규범을 뜻하는 윤리를 주제로 삼았다. 회고와 성찰의 결과였고 시대정신의 표현이었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따르거나 지켜야 할 도리가 인간의 윤리이듯 건축이 마땅히 따르거나 지켜야할 도리, 즉 자신에게 필요한 공간과 형태를 취하면서도 전체에 피해를 주지 않는 윤리적 건축을 아름다운 건축보다 상위에 두자는 의도다.

 

2011년 작고한 건축가 정기용도 유사한 말을 남겼다. 그는 ‘건축은 공공재이다. 한 사람만을 위한 건축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한 개인이 소유한 건물이라 하더라도 건축은 그 속성상 공공재일 수밖에 없다. 어느 땅에 누구 돈으로 짓더라도 그렇다. 재산으로서의 건축은 사유화할 수 있지만 건축이라는 존재 자체를 사유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면서 ‘사유지에 세워지는 건축도 크게 보면 지구 위에 서있다는 점에서 건축은 태생적으로 공공적이다. 물, 에너지, 통신 등 공공에서 만들어진 자원이 없으면 건축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건축의 윤리성을 강조하는 까닭도 그것이 공공재이기 때문이다’라며 건축의 공공성과 윤리성을 말했다.

 

반윤리적인 상황은 삼풍백화점 붕괴 때 극명하게 보여 주었다. 건물주는 ‘내 건물’임을 강조하며 무리한 설계변경을 강행했지만 정작 붕괴된 잔해 속에서 사상 당한 이는 천오백 명의 시민이었다. 건축학자 마이클 소킨의 지적처럼 ‘세계무역센터에서 3천 명의 사람이 죽었을지 몰라도 임대 공간은 무려 1천만 제곱피트가 파괴되었다’고 말하는 막장 드라마가 횡행하는 것이 현실에서의 도시와 건축이다. 이런 점에서 건축은 같은 금속공예품이라도 천마총 금관보다는 황동수저에 더 가깝다. 임금 혼자 머리에 쓰는 금관과 달리 모든 백성들이 매일 하루 세 번 입에 넣고 빠는 수저와 같다는 말이다.

 

건축이 이럴진대 도시는 말할 것도 없다. 도시는 인간이 만들어낸 어떤 것보다 강력한 공공재이다. 그만큼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도로와 광장, 하천과 공원, 건축물의 경관과 밀도, 물과 공기, 일조와 조망과 소음까지, 도시환경 어느 것 하나 공공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도시공간에서 반윤리적인 대표적 사례는 해안에 높게 지은 아파트이다. 자신들이야 전망 좋고 바닷바람도 시원하겠지만, 그 뒤에 서있는 수많은 낮은 집 사람들에게서 바다가 주는 혜택을 빼앗아 갔다. 더운 날 선풍기 앞에 딱 붙어 자신만 바람을 쐬는 꼴이며, 공연장 맨 앞자리에서 뒷사람 생각 않고 일어서서 구경하는 꼴이다. 미국의 도시계획가 제임스 라우스는 성공적인 수변공간을 설명하면서 수변에서 가장 기피해야할 건물로 주택, 오피스, 호텔을 꼽았다. 사적인 목적으로 사용되는 건물이 공적으로 사용되어야 할 해안을 독점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이 기준으로 부산, 울산, 마산 할 것 없이 해안 낀 도시 모두를 보자. 라우스의 주장에 부합되는 도시가 어디 한 군데라도 있는지. 가장 피해야할 해악이라지만 우리의 도시에는 차고 넘친다. 그 뿐 아니다. 권위적인 관공서, 나홀로 아파트, 부조화된 빌딩과 뻔뻔한 간판 등 도시건축의 윤리성에 반하는 것들이 도처에 있다.

 

성장의 시대 동안 우리의 도시는 키우고 짓는 일에만 급급했고 옆은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다. 공공성이 낮은 도시는 결국 시민 삶의 질을 떨어지게 한다. 경제성장도 될 만큼 되었고, 국민 90% 이상이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이제는 공공재로서의 윤리적 도시를 고민해야한다. 시민 스스로 주인의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 질 낮은 도시개발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비윤리적인 개발은 더욱 가속화되고 심화될 것이다.

 

도시는 인간이 동물처럼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곳이 아니다. 시장경제원리나 부동산의 수요와 공급의 논리로 만들어지는 집합체도 아니다. 도시는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평등하게 인간의 존엄성과 생존권이 보장되고 다수의 타인과 함께 공동생활이 추구되는 사회적 장소다. 그런 점에서 도시의 모든 장소는 시민 개인과 가족의 사생활이 보장되면서 다른 사람과의 공동생활이 함께 보장되어야 한다. 다함께 행복한 도시, 도시의 모든 것들이 시민 누구에게나 차이 없이 공유되는 도시, 보행자들이 긍지를 느낄 수 있는 도시, 그런 도시를 꿈꿀 때가 되었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는 공동선을 지향하는 사회에 필요한 것 중 하나로 시민의 연대의식을 들면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 모두 아이를 보내고 싶어 하는 공립학교가 있는 도시,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공립헬스클럽이 있는 도시, 상류층 통근자들도 타고 싶어 하는 대중교통이 있는 도시, 사람들을 집에서 끌어내 운동장·공원·도서관·박물관 등 시민들이 공유하는 장소로 모이게 하는 도시’를 말했다. 그런 도시가 시민 모두를 행복하게 하고, 모든 시민의 자존감을 높인다고 했다. 그런 도시가 정의롭다는 말이다. 그래서 묻는다. 우리의 도시는 정의로운가?

 

  • - 허정도 건축사ㅣ서진 종합건축사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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