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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렬과 함께하는 건축 시간여행] <26·끝> 안동 봉정사·영주 부석사

 

따로 또 같은 고려의 수학적 미학… 한국 건축의 황금시대 ‘우뚝’

 
입력 :2020-12-27
 

 

[김봉렬과 함께하는 건축 시간여행] <26·끝> 안동 봉정사·영주 부석사

 

 

현존하는 고려의 목조 건축물은 한반도 전체를 꼽아도 열 손가락이 남는다.
 
북한의 심원사 보광전과 성불사 응진전을 비롯해 수덕사 대웅전, 부석사 조사당, 거조암 영산전, 강릉 객사문 등이다.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역사적 가치는 물론 건축적 가치도 뛰어난 유산들이다.

특히 봉정사 극락전과 부석사 무량수전은 구조적 결구법이나 건물의 형식미에서 고려 목조건축물을 대표한다.
 
 
 
 
 

▲ 극소수만 남은 고려의 목조 건축은 모두 역사적·건축적 가치가 뛰어난 문화유산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고려 건물인 맞배지붕의 봉정사 극락전은 완벽한 조형미를 보여준다.
안동 오장환 기자 5zzang@seoul.co.kr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봉정사 극락전


천등산 깊은 산속에 자리잡은 봉정사는 신라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이 7세기 후반에 창건했다 전한다. 현존하는 봉정사의 건물들은 하나하나 모두 중요해 살아 있는 건축박물관을 이룬다. 고려 중기의 극락전(국보 15호)을 비롯해 조선 초기의 대웅전(국보 311호)과 고금당(보물 449호), 조선 중기의 화엄강당(보물 448호)과 만세루, 조선 후기의 영산암 등이 시대적 특징들을 잘 간직한 채 한자리에 모여 있다.

이처럼 시대적 건물들이 순차적으로 보존된 곳은 봉정사가 유일하다. 특히 극락전은 가장 오래된 현존 목조건물이다. “1363년 지붕을 수리했다”는 기록을 발견했다. 통상 지붕 해체 수리는 건설 후 150년 정도 뒤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최초 건립 연대는 고려 중기인 13세기 초반이다. 건립 시기가 확실한 수덕사 대웅전(1308년)보다 한 세기 정도 앞서는 셈이다.

극락전은 ‘정면 3칸×측면 4칸’ 몸체에 맞배지붕을 얹었다. 한식 건물로 정면보다 측면의 칸 수가 더 많은 건 희귀하다. 정면 한 칸은 4m 내외, 측면 칸은 1.5~2m로 매우 짧다. 측면에 기둥을 비정상적으로 촘촘히 세운 셈이다. 5개 기둥을 지붕 밑까지 세워 높이가 모두 다르다. 기둥들 윗부분을 수평부재가 꿰뚫어 서로를 연결한다. 그 위로 사선 부재들이 높이가 다른 기둥 끝들을 다시 연결한다. 그 위에 9개의 도리를 걸고 서까래를 얹어 지붕을 만들었다. 벽면의 크기에 비해 엄청 많은 부재들로 견고한 벽을 만들었다. 이 정도면 기둥식 구조가 아니라 벽식 구조라 불러야 할 지경이다. 중국에서는 이를 ‘천두식’이라 하여 남부 지방에서 흔히 쓰는 구조법이다. 신라 때 조성한 양양 선림원 터 법당에도 이러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고려 중기까지 천두식 구조는 종종 쓰였을 테지만 봉정사 극락전만 유일하게 남아 있다.

 

 

 

▲ 극소수만 남은 고려의 목조 건축은 모두 역사적·건축적 가치가 뛰어난 문화유산이다. 13세기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는 팔작지붕의 부석사 무량수전은 완벽한 조형미를 보여준다.
영주 오장환 기자 5zzang@seoul.co.kr

 

 

●봉정사 극락전과 너무 다른 무량수전

 
영주 부석사는 의상대사가 676년 창건한 최초의 화엄종 사찰이다. 소백산맥 급경사지에 10여 단의 석축을 쌓고 건물들을 배열해 독특한 가람을 조성했다. 가장 높은 단의 무량수전(국보 18호)이 현재 본전이며 뒷산에 의상을 기리는 조사당(국보 19호)이 위치한다. 조사당을 1377년 재건했고, 바로 전해에 무량수전을 다시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하지만 현 무량수전의 창건 연대는 그보다 150년 앞선 13세기 초로 보는 것이 주류 학설이다. 봉정사 극락전이 재평가되기 전까지 무량수전이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는 영예를 누렸다. 두 건물은 비슷한 시기에 근접한 지역에 세워졌지만, 구조와 형태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무량수전은 ‘정면 5칸×측면 3칸’의 몸체에 팔작지붕을 얹었다. 정면과 측면 모두 기둥 간격이 넓고 기둥 높이도 거의 동일하다. 이러한 구조는 ‘대량식’ 또는 ‘들보식’이라 하여 조선 이후 모든 목조건축의 구조법이다. 극락전의 천두식 구조에 비해 부재의 수를 급격하게 줄여 경제적이고 넓은 공간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천두식에 비해 덜 견고해서 별도의 구조체를 고안해야 했다. 내부에 두 열의 높은 기둥을 세워 건물 전체의 중심 구조체를 만들었다. 자연히 가운데 높은 내진 공간이, 그 앞뒤로 낮은 외진이 만들어진다. 마치 중세 유럽 성당의 바실리카 공간과 같은 구성이다. 무량수전은 남쪽이 정면이지만, 내부의 아미타불은 서쪽에 앉아 동쪽을 바라본다. 고주 열의 방향에 맞추어 내부공간의 방향성을 바꾼 것이다.
 
 
 
 

▲ 극소수만 남은 고려의 목조 건축은 모두 역사적·건축적 가치가 뛰어난 문화유산이다.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과 주심포 구조. 왼쪽 귀기둥을 오른쪽 기둥보다 높인 ‘귀솟음’ 기법이 뚜렷하다.

영주 오장환 기자 5zzang@seoul.co.kr

 
 
 
●불안을 잠재우는 감각적 정교함
 
 
한식 건축의 구조는 무겁고 경사진 지붕면을 선적 요소인 목재로 지지하기 위한 공학적 틀이다. 뒤집어 말하면, 육중한 기와지붕의 무게가 목조 뼈대를 눌러 건물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봉정사 극락전의 천두식 구조나 부석사 무량수전의 고주 집합체는 각기 지붕의 하중을 감당하려 개발된 서로 다른 구조체계였다. 그러나 두 건물에 사용된 세부기법들은 놀랍게도 공통적이다. 부재들은 모두 목재이며 나무의 물질적 속성은 공통적이기 때문이다. 나무는 죽어서도 유기체적 성질을 유지한다. 휘기도 줄어들기도 비틀리기도 한다. 특히 한식 건물의 주재료인 소나무는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변형이 심하다. 목재의 변형에 대해 이를 상쇄할 여러 기법들이 발전했고, 그 완성을 고려의 두 건물에서 볼 수 있다.

무거운 지붕의 하중은 모퉁이 기둥에 집중돼 안쪽 기둥에 비해 좀 더 줄어들게 된다. 따라서 ‘귀솟음’이라 하여 모퉁이 기둥을 좀 더 높게 만든다. 경사진 지붕은 기둥을 바깥쪽으로 밀어내게 된다. 이를 방지하려 수직선보다 약간 안쪽으로 기둥을 기울인다. 중국 송나라 때 출간된 건축기술서 ‘영조법식’에는 귀솟음과 안쏠림의 기준 수치들을 계산하여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의 건축은 기계적인 중국식 기술보다 전체의 조화를 우선해 유연한 기술이 발달했다. 창작자로서 목수의 판단과 안목이 건축의 격을 좌우하게 됐다.

이러한 세부기법들은 물리적 변형을 보완하려 개발됐으나, 궁극적으로 심리적 불안을 제거하고 시각적 안정을 얻기 위한 방편이 됐다. 지붕 처마를 수평선으로 맞춘다면 처마선은 처질 것 같아 불안해 보인다. 그래서 아예 좀 심하게 들어 올린다. 처지더라도 들어 올린 채로 안정된다. 기둥의 가운데를 볼록하게 배흘림하면 더 견고해 보인다. 두 점을 지나는 직선은 단 하나지만 곡선은 무수히 많다. 직선이 휘어지면 곡선이 되지만, 곡선은 휘어도 곡선이다. 귀솟음도 안쏠림도 배흘림도 물리적 변형을 막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수평, 수직, 직선으로 변하지 않는다. 변형되더라도 여전히 솟은 채로, 쏠린 채로, 배흘린 채로 안정돼 있다.
 
 
 
 

▲ 극소수만 남은 고려의 목조 건축은 모두 역사적·건축적 가치가 뛰어난 문화유산이다. 무량수전 내부는 고주들을 2열로 세워 높은 내진공간을 만들었고, 좌우로 낮은 외진을 두었다. 불상은 건물 측면을 보도록 동향하고 있다.
영주 오장환 기자 5zzang@seoul.co.kr

 

 

 

▲ 극소수만 남은 고려의 목조 건축은 모두 역사적·건축적 가치가 뛰어난 문화유산이다. 봉정사 극락전의 지붕틀과 내부 구조를 보면 항아리보와 산(山)형 대공 등 독특한 고려시대 부재들이 결구돼 있다.
안동 오장환 기자 5zzang@seoul.co.kr

 

 

●세밀가귀, 건축은 큰 가구다


봉정사와 부석사는 운 좋게도 전쟁도 피해 가는 깊은 산속에 있어 지금까지 보존됐다. 극락전은 경전을 보관하는 대장전이었고 무량수전은 강당이었다는 설도 있다. 산골 사찰에 있는, 주불전도 아닌 부속건물이었다. 거조암 영산전 역시 시골 사찰의 강당이었고 강릉 객사문은 지방 관청의 정문에 불과했다. 당대 최고의 격을 갖춘 건물이라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뛰어나게 아름답고 정교하다. 우연히 남은 변방의 건축물들이 이럴진대 최고작들의 수준은 얼마나 더 높았을까?

고려의 대들보는 항아리 모양으로 윗면은 두껍고 둥글게, 아랫면은 얇고 직선으로 가공한다. 윗면은 지붕의 하중을 담당하며 아랫면은 시각적 날렵함을 제공한다. 봉정사 극락전 항아리보의 밑면 두께는 4치(약 3㎝)인데 이 수치가 모든 부재들의 기본이 된다. 다른 부재들은 1.5배, 2배, 2.5배가 되어 6치, 8치, 1자 등으로 규격화된다.

이런 수학적 관계를 가져야 수많은 부재들을 정교하게 가공할 수 있고 짜 맞출 수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폭과 높이, 길이의 비율은 1대1대1.62로 황금비율이다. 정면 한 칸의 높이와 길이는 1대1.4로 루트2비율이다. 이 비례들은 기둥과 도리와 보의 길이 등 구조 부재들의 관계다. 그러한 수학적 관계 속에서 부재를 마련해야 견고한 뼈대를 만들 수 있다. 합리적인 구조와 골격의 비례는 황금비나 루트비 등 비례를 낳았고 동서를 막론한 고전적 형식미가 되었다.

고려가 남겨준 어떠한 건축물도 완벽하고 아름답다. 정교한 수학적 비례의 구조, 그리고 시각적 안정성까지 고려한 섬세한 세부기법들이 하나의 전체로 통합된 까닭이다. 고려의 건축은 너무나 공예적이어서 한 점의 큰 가구와 같다. 목재의 물성을 탐구하고, 부재를 정밀하게 가공하고, 합리적인 구조 뼈대를 짜 맞추었다.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고려의 공예품들을 “세밀함이 가히 귀하다 할 만하다”(細密可貴)고 평했다. 고려의 건축은 여기에 완벽한 전체적 아름다움까지 더했다. 그리고 지금은 사라진 천두식과 같이 다양한 실험들을 시도했던 한국 건축의 황금기였다.


건축학자·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서울신문  2020-12-28 2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