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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의 연인'이었던 故 윤정희 배우를 추모하며 ......

 

 

"한국여성배우 최초로 석사 논문에 영화 유학까지.." 故 윤정희 배우는 누구보다 영화에 진심이었다

유해강 기자별 스토리

HuffPost - South Korea

 

 

 

 

"한국여성배우 최초로 석사 논문에 영화 유학까지.." 故 윤정희 배우는 누구보다 영화에 진심이었다© 제공: 허핑턴포스트코리아
 
 
 

배우 윤정희가 사망했다. 향년 78세, 프랑스 자택에서였다. 곁에는 배우자 백건우와 딸 백진희가 있었다. 백건우는 윤정희가 딸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으며 꿈꾸듯 떠났다고 했다. 윤정희는 근 10년 동안 대외 활동을 못했다. 망각의 병 알츠하이머 때문이다. "90살까지 연기하고 싶었다"던 윤정희. 그의 마지막 작품은 2010년에 개봉한 영화 ,<시>다. 그때 그는 66세였다.

 

 

 
 영화에 살다 간 윤정희, 마지막 작품은

<시>는 이창동 감독의 5번째 작품이다. 칸 영화제 각본상을 포함해 국내외에서 17개 상을 받았으며 평론가 평점은 평균 4.5점을 웃돈다. <시>는 시를 쓰고자 하는 한 노인, 미자의 일상을 보여준다. 미자의 상황은 녹록지 않다. 홀로 손자를 키우며 생계를 꾸리는 상황에 알츠하이머 진단까지 받았다. 단어가 잘 떠오르지 않고 기억이 흐려진다. 그럼에도 미자는 평생의 꿈인 시 쓰기를 놓지 않는다.

 

 

 

"한국여성배우 최초로 석사 논문에 영화 유학까지.." 故 윤정희 배우는 누구보다 영화에 진심이었다© 제공: 허핑턴포스트코리아
 
 
 

윤정희는 에서 알츠하이머에 걸린 노인 '미자'를 연기해 그해 대종상과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미자'는 윤정희의 본명(손미자)이기도 하다. 이창동 감독은 윤정희를 모델로 의 대본을 썼다고 밝혔다. <시>를 찍을 무렵에도 윤정희는 알츠하이머 증세를 보였다. 이후로는 작품 활동이 끊겼다. 그러니 그의 사후 "시처럼 살다 갔다"는 중의적 표현을 담은 제목의 기사가 우후죽순 쏟아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정말 윤정희는 '시'처럼, 혹은 처럼 살고 갔을까? 안다. 이 어구는 매력적이다. 몇 가지 측면에서는 사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윤정희의 삶을 정확하게 요약하는 말이냐고 묻는다면 내 답은 '아니'다. 윤정희가 출연한 영화는 300여 편에 달한다. 데뷔 첫해에만 22편의 영화를 찍었다. 하루 3개 배역을 소화하느라 차를 타고 가면서 분장을 바꾸는 일도 예사였다. 마치 영화 의 한 장면처럼. 어떤가. 시보다는 영화에 훨씬 가깝지 않았는가, 윤정희의 삶은.

 

 

 

"한국여성배우 최초로 석사 논문에 영화 유학까지.." 故 윤정희 배우는 누구보다 영화에 진심이었다© 제공: 허핑턴포스트코리아
 
 
 

그렇다고 "영화처럼 살다 갔다" 혹은 "영화 같은 인생이었다"고 쓰지는 않겠다. 모든 삶에는 영화 같은 측면이 있으니다. 대신 "영화에 살았다"고 해보자. 모든 사람이 영화에 살 수는 없다. 영화인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윤정희는 그렇게 했다.

 

 

 한국여성배우 최초로 석사 논문 쓰고 파리 유학까지

윤정희는 1967년 영화 으로 데뷔해 대종상·청룡영화상에서 각각 신인상·인기상을 받으며 스타덤에 올랐다. 조선대 영문학과 재학 중의 일이다. '윤정희'라는 예명도 그때 지었다. 

 

 

"한국여성배우 최초로 석사 논문에 영화 유학까지.." 故 윤정희 배우는 누구보다 영화에 진심이었다© 제공: 허핑턴포스트코리아
 
 
 

"왜 고요 정(靜)을 썼냐 하면, 그 당시도 그렇지만 영화계는 화려하잖아요. 아무리 화려해도 저는 조용히 살고 싶더라구요. 윤씨 성은 괜히 좋더라구요. 우리 친구 중 공부도 잘하고 얌전하고 예쁜 애가 있었는데 윤씨였어요. 윤정희라고 하니까 흐름이 좋고. 본명으로는 나가고 싶지 않더라구요. 다른 인생이었으니까 ‘다른 인생은 다른 이름으로 나가자’ 한 거죠.(씨네21)"

그렇게 손미자는 윤정희가 되었고 윤정희는 잘 나갔다. 해마다 수십 편씩 영화를 찍었다. 몰아치는 스케줄에 "이 세상에 나라는 사람이 100명"이기를 바란 적도 있다. 영화가 곧 삶이고 삶이 곧 영화이던 시절이었다. 그는 다작 배우로 만족하지 않았다. 영화를 연구하고자 했다. 윤정희는 한국 여성배우 최초로 석사 논문을 쓴 배우다. 논문 검색 사이트에 들어가 손미자를 찾으면 '영화사적 측면에서 본 한국 여배우 연구:1903~1946년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논문이 나온다. 1971년, 윤정희가 중앙대 대학원 연극영화학과 석사과정을 마치며 쓴 논문이다. 

 

 

 

"한국여성배우 최초로 석사 논문에 영화 유학까지.." 故 윤정희 배우는 누구보다 영화에 진심이었다© 제공: 허핑턴포스트코리아
 
 
 

윤정희는 계속 영화를 찍었다. 그러다 돌연 유학을 결정했다. "영화와 연기를 더 공부하고 싶다." 그가 청룡영화제 시상식에서 밝힌 소감이다. 그 소감은 곧 현실이 됐다. 1974년 윤정희는 서강대학교 총장 신부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로 건너갔다. 그는 파리 제3대학교 대학원에서 영화학 그리고 예술학을 전공하고 졸업했다. 파리 제3대학은 언어와 문학 계열 학과로 유명하다. 

유학을 한다고 배우를 그만둔 것은 아니다. 윤정희는 파리와 한국을 오가며 학업과 연기를 병행했다. 74년에는 영화와 유일한 드라마 출연작인 를, 75년에는등 5편의 작품을 찍었다. 76년도는 그가 데뷔 이래 처음으로 1편도 찍지 않은 해다. 이후 점차적으로 작품 출연은 줄었고 94년 을 끝으로 긴 공백기가 잇따랐다. 연기를 쉬는 동안에는 청룡영화상(98~06년)을 포함한 국내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으로 참석했다. 줄어든 배우 활동만큼 프랑스에서의 삶이 커졌다. 남편 백건우의 영향이다.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결혼, 가족 간 논란 일기도
 
 
 
"한국여성배우 최초로 석사 논문에 영화 유학까지.." 故 윤정희 배우는 누구보다 영화에 진심이었다© 제공: 허핑턴포스트코리아
 
 
 

윤정희와 백건우. 두 사람은 72년 독일 뮌헨 오페라 극장에서 처음 만났고 이후 74년 윤정희가 유학 간 파리에서 재회, 연인이 되어 몽마르트르 언덕 낡은 집에서 동거하다가 76년도에 결혼하고 이듬해 딸을 낳았다. 딸은 바이올리니스트 백진희다. 이후 윤정희는 백건우의 피아니스트 활동을 보필했다. 윤정희는 자신이 "파리에서 실직자"였다며 "남편 스케줄 정리하는 비서"라고 표현했다. 윤정희는 백건우의 인터뷰나 사진 촬영 등 연주 외 일정을 도맡아 관리했다. 백건우가 연습에 집중하도록 돕기 위함이었다. 휴대전화는 하나로 공유했다. 늘 함께 다녀서 두 개 쓸 필요가 없었다.

불과 2년 전 2021년에는 윤정희 친가가 청와대 청원을 통해 백건우 부녀를 고발하며 논란이 일기도 했다. 알츠하이머를 앓는 윤정희를 백건우가 돌보지 않고 방치한다는 게 요지였다. 백건우 측은 해당 내용이 거짓이라고 반박했다. 앞서 2019년에도 비슷한 사유로 윤정희 친동생들이 백건우 부녀 후견인 지위에 이의를 제기했으나 프랑스 법원은 근거가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백건우 부녀의 후견인 지위는 계속 유지됐다. 

 

 

 

 윤정희는 눈 감아도 그의 영화는 우리와 남는다
 
 
 
 
"한국여성배우 최초로 석사 논문에 영화 유학까지.." 故 윤정희 배우는 누구보다 영화에 진심이었다© 제공: 허핑턴포스트코리아
 
 
 
 

가브리엘 포레의 레퀴엠 라단조 48-7번 '천국에서'가 흐르는 가운데, 윤정희의 장례 미사가 열렸다. 프랑스 파리 한 성당에서 열린 장례 미사에는 남편 백건우와 딸 백진희, 그리고 고인의 지인들이 참석했다. 백건우는 "천사가 윤정희를 천국으로 안내한다는 뜻이다. 죽음이 무겁고 시커멓고 슬프기만 한 게 아니라 희망적으로 볼 수 있다"며 선곡 이유를 밝혔다. 백진희는 "어머니는 예술을 당연한 이치로 여겼고 영화를 위해 존재했다"는 내용의 추도사를 불어로 낭독했다. 의 이창동 감독도 그 자리에 있었다. 이 감독은 "60~70년대 데뷔한 여배우로서, 특히 영화배우로서의 자의식과 정체성을 평생 잃지 않았던 한국배우는 윤정희 선생님이 최초"라며 "내면이 예술가였던 분"이라고 말했다.

"영화에 살았다"고 썼지만, 이 글을 쓰는 내내 내 머리에는 영화 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시처럼 살다 갔다"는 표현이 아예 부정확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의 어느 장면에서 미자는 흐르는 강의 이편과 저편을 잇는 긴 다리에 서서 수면을 바라보다 흰 모자를 바람에 날려보내고 만다. 영화의 마지막, 다시 그 다리를 배경으로 미자가 쓴 시 '아네스의 노래'가 낭독된다. 모자는 멀리 날아갔지만 그의 목소리는 남았다. 시로, 그리고 영화로. R.I.P.

 

 

 

 

"한국여성배우 최초로 석사 논문에 영화 유학까지.." 故 윤정희 배우는 누구보다 영화에 진심이었다© 제공: 허핑턴포스트코리아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랫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젠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 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을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에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 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앉은 외로운 들국화 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랫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다시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시 '아네스의 노래', 영화中

유해강 기자 haekang.yoo@huffpo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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