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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건축 갤러리 ■/충 북

괴산 화양구곡 (2013.05.)

 

 

 

산자수려한 괴산에는 화양동구곡, 쌍곡구곡, 선유동구곡, 풍계구곡, 고산구곡, 연화구곡,

갈은동구곡 등의 이름난 계곡들이 즐비하다.

 

특히 ‘금강산 이남의 최고 절경’이라는 화양동구곡은 조선시대 대학자인 우암 송시열 선생이

병자호란 이후 이곳에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하였고 중국의 무이구곡을 본떠

화양구곡(경천벽, 운영담, 읍궁암, 금사담, 첨성대, 능운대, 와룡암, 학소대, 파천)의 이름을

직접 지었다고 한다.

 

화양동(華陽洞)은 중화의 화(華)자와 일양내복(一陽來腹)의 양(陽)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즉 중화가 밤이 지나면 낮이 다시 오듯이 되살아날 것이라는 뜻으로

오랑캐인 만주족 청나라에게 멸망한 중화 명나라가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모화사상(慕華思想)을

담은 표현이라고 한다.

이후 청나라를 몰아내기 위한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으나 효종임금의 승하로 실패로 끝나고 만다.

 

 

 

 

 

 

 

 

 

 

 

 

 

 

제 1곡(曲) 경천벽(擎天壁)

 

이곳은 제 1곡(谷)인 화양계곡 입구의 경천벽(擎天壁)인데 계곡을 건너 기암이 가파르게 솟아 있어

그 형세가 자연의 신비라할만큼 기묘한 층암 단애(斷崖)를 이뤄 하늘을 치솟아있는 모습으로

이름을 경천벽(擎天壁)이라한다.

 

 

 

 

 

 

 

 

 

제 2곡(曲) 운영담(雲影潭)전경

 

이곳은 제 2곡인 운영담(雲影潭)전경인데 운영담은 계곡에 맑은 소담이 이루어져

울울창창(鬱鬱蒼蒼)한 송림과 큼직한 바위돌이 높이 서 있고,

그 앞에는 넓게 소담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맑은 날에는 흰 구름의 그림자가 비친다고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제 3곡(曲) 읍궁암(泣弓岩)

 

이곳은 화양구곡중 제 3곡으로 우암 송시열이 효종임금의 승하로 북벌이 좌절되자

효종의 기일마다 이 바위에 올라 효종을 그리며 울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성리학 중심지 중 한 곳인 우암 송시열 유적이다. 송시열(1607∼1689)은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이자 문신으로 조선 효종(재위1649∼1659)을 도와 북벌정책을 추진하는 등

자주적인 정치를 펼쳤으며, 주자학의 대가로서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화양서원은 우암 송시열이 잠시 머물렀던 장소에 세워진 서원으로 조선시대 학자들이 많이 모였던

장소이다.

만동묘의 자리는 중국 명나라 황제인 신종과 의종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던 곳이다.

만동묘 주변에는 송시열과 관련된 암서재, 하마비, 읍궁암, 송시열 무덤 및 신도비 외에

암서재 근처의 암벽에 ‘충효절의’·‘비례부동’이란 글을 새긴 곳이 많이 있다.

 

송시열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정신이 깃든 곳일 뿐 아니라

조선 성리학의 중심지로서, 한때는 일제에 의해 파괴되었던 곳이다.

민족 정기회복을 위한 교육 장소로서의 중요성이 인정되는 곳이다.

 

※(괴산우암송시열유적 → 괴산 송시열 유적)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글출처 : 문화재청)

 

 

 

 

 

 

 

 

 

 화양서원 [華陽書院]

 

노론(老論)의 영수 우암 송시열을 제향한 서원으로서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폐 되었다가

2005년에 복원하였다.

 

이 서원은 당시 서원 중에서도 가장 횡포가 심해 제멋대로 발행하는 화양묵패(華陽墨牌) 때문에

폐해가 컸다. 묵패란, “서원에 제수전(祭需錢)이 필요하니 아무 날 아무 시간까지

얼마를 봉납(奉納)하라.”는 식의 고지서(告知書)에 묵인(墨印)을 찍어 군(郡) ·현(縣)으로

발송하는 것이지만, 이 묵패를 받은 자는 관(官) ·민(民)을 가리지 않고 전답이라도 팔아서 바쳐야만 했다. 만일 불응하면 서원으로 잡혀가 협박을 받고 사형(私刑)을 당할 정도로 횡포가 심했고

대원군시절, 서원철폐의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만동묘(萬東廟)

 

만동묘(萬東廟)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 신종(神宗)과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을

제사지내기 위해, 우암 송시열의 유명을 받은 권상하 등 그의 문생들이 1703년(숙종 29) 에

이곳 화양동(華陽洞)에 지은 사당이다.

 

만동묘의 아주 가파른 계단은 참배객들이 기다시피 올라가서 예의를 다갖추도록

의도적으로 만든 건축적 장치이다.

 

 

 

 

 

 

 

 

 

 

 

 

 

 

 

 

 

 

 

 

 

 

 

 

 

제 4곡(曲) 금사담(金砂潭)과 암서재(岩捿齎)

 

맑은 물과 깨끗한 모래가 보이는 계곡속의 못이라는 의미로 금사담(金砂潭)이라 불리우며

화양구곡(華陽九曲)중에 중심에 위치하는 곳으로 조선 숙종때 정계를 은퇴한 우암 송시열이

이곳 반석위에 주자의 운곡정사를 본떠서 만든 집을 지어 그 이름을 암서재(岩捿齎)라하고

이곳에 은거하며 학문을 연구하고 수양하였으며, 암서재 건물은 여러차례 중수를 거쳤으며

현재의 건물은 1986년에 중수하였다고한다.

 

암서재 아래 단애(斷崖)에는 유교적 대의명분론을 나타내는 글들을 즐비하게 새겨 두었는데

명나라 태조의 글씨로 새긴 충효절의(忠孝節義)는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자고 했다.

 

 

 

 

 

 

 

 

 

 

 

 

 

 

 

 

 

 

 

 

 

 

 

 

 

 

 

 

 

 

 

제 5곡(曲) 첨성대(瞻星臺) 

 

첨성대(瞻星臺)는 겹처 있는 바위가 약 100m에 이르며 이 바위 위에서 성운을 관측할 수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제 6곡(曲) 능운대(陵蕓臺) 전경

 

장대한 바위의 자태가 마치 하늘을 치솟아 구름을 맞잡을 수 있다고 하고 오래전에 장군의 능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채운암

 

채운암은 고려 충렬왕 3년(1277) 도일선사가 세운 암자로 조선 광해군 2년(1619) 혜식선사가

고쳐 지으면서 채운암이라 하였다.

효종 4년(1655)에는 혜일선사가 지금의 자리에 욱장사를 지었으나 구한말 왜병의 침입으로

대부분이 불에 타서 없어지고, 1948년 대홍수로 채운암이 파괴되었다.

1949년에 남아 있는 요사채의 일부를 지금 있는 자리에 옮겨 채운암이라 부르고 있다.

 

채운암 대웅전의 안쪽에는 목조여래좌상(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91호)을 모시고 있다.

(글출처 : 문화재청)

 

 

 

 

 

 

 

 

 

 

 

 

 

 

 

 

 

 

 

 

 

 

 

제 7곡(曲) 와룡암(臥龍岩)

 

길게 늘어진 바위의 형태가 마치 용이 누워 있는듯한 모양을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한다.

 

 

제 8곡(曲)학소대(鶴巢臺)

 

이곳은 수목이 울창하여 바위와 운치있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으로서

"백학이 바위 위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았다"하여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제 9곡(曲)파천(巴串)

 

이곳은 화양구곡(華陽九曲)중 마지막인 제 9곡(曲)인 파천(巴串)으로 계곡을 많이 차지한 흰 바위가 티 없이 넓게 펼쳐져 있으며 그 위로 흐르는 물결이 마치"용의 비늘을 꿰어 놓은것"처럼 보여 파천(巴串)이라 부르며, 신선들이 이곳에서 술잔을 나누었다는 전설이 서린 곳이다.